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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하책방 Jun 30. 2024

노을과 香氣

詩와 나무





   늦은 오후 그 산에 왜 갔는지, 아마 쓸쓸한 저녁을 기다렸는가봅니다...... 언젠가 당신이 노을을 상처에 빗대었지요 그 후 노을을 당신처럼 여기는 버릇이 생겼답니다 그러나 햇살을 피해 숲속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보랏빛 꽃무더기가 또렷이 길을 만들며 흩어져 있는 것입니다 누가 꽃잎을 뿌려 먼 길을 만든 걸까 서늘한 고요가 숲의 공기를 당기고 있을 뿐 아무도 내 앞뒤에 없습니다 이제 사람이 두려운 건가요...... 꽃잎 따라 숲을 헤매었지요 차라리 보랏빛을 쫓았다는 게 더 어울립니다 마치 그 꽃잎의 흩어짐 끝에 노을과 당신이 있을 환상을 품고, 그래요 환상이지요...... 그러나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금방 끝날 것 같은 그 길 어디선가 찬물을 뒤집어쓴 느낌, 느낌표의 풀꽃조차 나를 힐끗 쳐다보는 것, 그 지독한 자기 모멸감! 숲의 더운 기운이 한목에 밀려오고 썩어가는 낙엽 위에 지쳐 누웠습니다 무언가 사방이 환해져서 문득 눈을 뜨니 아아 보랏빛 꽃잎들이 숲의 거대한 빛기둥을 따라 위로 위로 올라가고 있는 겁니다 어두운 그늘에서도 꽃이 아니라 눈부신 등불처럼 여기저기 곳곳에 켜져 있습니다 나는 겨우 숲의 아래만 보고 걸었던 겁니다 그제서야 숲속 불타는 고요 가운데 비명을 지른 듯 또는 너울너울 춤을 추는 듯한 기미와 마음을 건드리던 짧은 향기가 떠올랐습니다 그 무수한 등불을 켠 것은 내가 아는 칡덩굴의 꽃입니다 울렁거리는 마음을 온전한 칡꽃 한 송이와 바꾸고 숲밖으로 나오니 서쪽에는 노을이 빛무리처럼 번져 있습니다



「노을」

  송재학 集『푸른 빛과 싸우다』(문학과지성 , 1994




노을


                                                                                     1.


   서쪽 노을을 지키느라 어린 히아시스꽃들이 분주하다. 한낮의 꽃무늬 속 더운 그림자들을 걷어 올리고 뒤뚱뒤뚱 걷어올린 꽃잎에 노을 빛을 가득 담는다. 그대의 길도 그 빛을 따라 가지런한 무늬가 된다. 노을이 깊어 질수록 어린 꽃잎들은 투명해진다. 물과 바람이 뒤섞인다. 그대가 그 안에 묵묵히 앉아있다. 저편의 길이 노랗게 붉은 진공이 될 때, 나는 히아시스 곁에 있다. 


                                                                                     2.

   낯선 노을을 보겠다고 여기 앉아있었다. 노을이야 천번을 더 봤을 것인데 뭐가 다르겠냐고 하는 핀잔을 겅중겅중 건너듣고 당신이 새떼들이 뛰어오르고 도깨비보다 더 붉은, 손만 닿아도 타버릴 것 같은 붉은 노을을 보았냐고 묻고 싶었다. 쓸데없는 일이지. 벚나무 꽃타령이나 하고 꽃그늘에 앉아 술타령이나 할 줄 아는 양반들이 무얼 알겠나. 세월에 지워진 무량수전 처마의 단청빛이 노을과 닮았다는 것을 알겠는가. 물 속에 얼비친 노을이 바람에 일렁이는 것이 그리움인지 한편에서 밀려오는 어둠이 어디 끝간데 없이 칠흙같은 生의 끝인지를 생각이나 해보았겠나. 노을에 취한 마음이 무엇인지 알리가 없지. 노을에 젖은 구름 뒤 한량없는 어둠의 의미를 알리가 없지.





香氣


                                                                                     1.


花香百里, 꽃향기는 백리를 가고

酒香千里, 술의 향기는 천리를 가고

人香萬里,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



어떤 글을 읽다 보면 문득 그 글이 향기가 되어 날아온다 

봄 아지랑이 같은

비 그친 하늘에 물든 노을 같은

바다에 너울거리는 달빛 같은


고요에 담근 손에서 멀어져간 바람이 

닿지 않는 거리,

내 깊은 곳 내려앉은 그 마음,

향기, 하나.



                                                                                    2.


   사람은 무엇으로 기억될까. 나를 그미는 어떻게 기억할까. 기억나지 않는 얼굴, 다만 오랫동안 서가의 책들을 어루만지던 손가락들만이 내 기억에 남아 그를 지킬 수도 있고, 어느 날 환한 햇살을 안고, 눈부신 노을에 물들던 머리카락만 기억할 수도 있다. 기억은 내가 안고 싶은 것도 손에 쥐고 언제나 매만지고 싶은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듯 하다. 그런 제멋대로의 기억이 그리움으로 치환되면 그것은 한없이 얇은 구름 한 장 위에 발을 내딛는 것과 다름 아니다. 저 넓고 깊은 슬픔의 낭하로 언제든 떨어질 거라는 각오를 해야한다는 것. 향기, 냄새, 바람을 따라 떠도는 이런 종류의 기억은 더더욱 그 슬픔의 깊이를 더한다. 벚꽃 향기, 겨울 산 향기 그리고 그 냄새를 따라 오는 소리들. 눈 감고 코를 열고 귀를 열고 바람에 나를 맡긴다. 그런 슬픔이다, 그미는. 남아 있어도 바람을 따라 사라질 그런 기억을 부여잡는 어느 봄날의 일기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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