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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하책방 Jun 12. 2024

가을과 경

詩와 나무




     며칠 동안 무 도둑을 찾아 나서야겠다는 생각만 하다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엄마 갔다 올게, 경아


     오래 키운 개는 앞발에 턱을 괸 채 미동도 않았다 경이는 무 도둑을 보았을까 누가 지나가든 매사에 심드렁한 개는 그날도 뿌연 구름이 낀 눈을 깜박이며 하품만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여름 내내 물을 주고 가꾼 화단의 무가 모조리 뽑혀나간 그날 아침, 그런 날에도 버스는 제 시각에 도착하고 택배가 날아오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컴퓨터의 전원을 누르면 파스스 소리와 함께 불이 들어온다 먹다 남은 카레를 천천히 씹으며 생각했다 어쩌다가 무를 도둑맞게 되었을까 그러니까 삼 년 전 어디선가 얻어왔다며 아버지가 던진 흰 봉투 속에는 씨앗들이 한가득이었는데 열심히 백과사전을 들추어봐도 도무지 무슨 씨앗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찬장 속 밥그릇 안에 담아뒀다 올봄이 되어서야 화단에 뿌려볼 생각을 했는데 지나가던 노인이 말했다 그거 참 커다란 무가 되겠어  그는 자고로 뿌리채소는 흙을 깊게 갈아야 한다며 이런저런 조언을 했고 나는 그날부터 커다란 무를 기대하며 열심히 키웠던 것이다 그런데 무라는 것은 흙 아래 묻혀 있고 흙 위로는 푸른 이파리밖에 없으니까 꽉 들어찬 화단을 보면서도 이게 과연 무가 맞는가 싶었는데 이제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니까 무 도둑을 잡아서 물아봐야 하는 것이다 당신이 훔쳐간 것이 정말 무가 맞는지 그런데 대체 무는 어떻게 뽑아갔을까 이파리를 잡고 힘을 준 다음 한 번에  뽑아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무 도둑이 혼자 하지 못했다면 이파리를 잡은 무 도둑의 허리띠를 잡아주는 조력자가 있었을 것이다 아파트 경비원이었을까 아니면 지나가던 행위예술가 아니면 심심해서 내려온 뒷산의 고라니였을 수도 있다 누구든 힘겹게 무를 뽑는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왜 하필 무였을까 무를 훔쳐가기로 결심한 사람의 마음 같은 건 어디서 들여다볼 수 있나 이렇게 생각만 할 때가 아니라 오늘은 집 주변을 둘러보기라도 해야지 싶었다 옷장을 열어 외투를 꺼내 입는데 벌써 가을인 건가 가을에는 가을무가 맛있다고들 하는데 그러니 무 도둑을 이해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고 그때 경이가 갑자기 텅 빈 화단을 향해 컹컹 짖기 시작했다 나는 경이를 품에 안고 가을이 오는 모습을 보았다 




「가을과 경」

  한여진 集『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문학동네, 2023






가을


늦은 오후에 우는 사람들을 보았다. 망각과 후회의 근방에 놓여진 지난 시간들이 그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무슨 빛깔로 서있어야할 지 망설이는 계절이 우는 얼굴들을 노랗게 물들이는 동안 남은 오후의 빛들은 마지막이 될 지 모르는 노을로 줄을 맞추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해가 지고 노을이 지고 나를 어루만지던 그대의 손이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새로운 기억들이 자라나는 일보다 더 많이 사라지는 것들을 지켜왔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울고 있을 준비를 해왔던 것일까. 


아침을 잃지 않으려 애쓰던 봄이 햇살을 머금고 바람에 부풀어 짙은 여름이 되었던 것처럼, 닿기만 해도 불타오르는 뜨거운 입김이 서늘한 빗물이 되어 다른 빛깔의 붉은 시간을 만들어내는, 가을. 오래 걸어온 길이 결굳 내가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깨닫는 계절, 그리고 손안에 천천히 피어오르는 차가운 불. 그것은 마지막을 준비하는 늙은 무희의 화려한 화장같은 것이었다. 


"울지 말아요. 화장이 지워지네요. 이제 이 화려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불타오르지 않아도 뜨거워지지 않아도 되는 고요한 眞空이 올 거에요."


손을 오므리면 불이 꺼질 것이다, 그래도 너를 생각하는 빛은 남아 다음 계절의 무늬가 되리라 생각한다, 계절이 내게 가르쳐 준 기억만큼의 깊이로.




경(憬), 깨달음

깨닫는다는 말은 안다는 말과 다르다. 거기엔 몇 가지 조건적 수사가 연결되는데 그것은 수동적인 주입식 앎이 아니라 능동적인 그리고 좀 더 철학적이고 거시적인 이해를 의미한다. 그것은 어떤 규칙을 이해한 '앎'에서 그 규칙이 삶의 의미와 방향, 그리고 구조적인 질서에 대한 이해로 진보해 나감을 의미하는 것이다.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이는 그 이해의 깊이에 비례한다. 세상에 태어난 얼굴 생김새가 제각각이듯 성정도 가치관도 다 제각각이다. 삶의 방향과 이해도 다 자신의 그릇만큼 가지고 있기에 스스로 얼마나 많은 이해를, 그래서 그릇의 깊이를 깊고 넓게 만들어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을 지는 스스로의 몫이다. 인생은 경주가 아니기에 절대적으로 평가하거나 비교할 수 없는 깨달음의 질서는, 그러나 우리가 배워온 역사와 철학과 문학에서 보여진 절대적인 가치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을 참고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깨달을 지에 대한 질문은 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목표로 귀결된다. 쉽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삶의 방법적인 것으로 다시 옮겨가게 되고 그것이 스스로의 삶에 자세를 결정하게 되는 근거가 된다. 


곰곰히 들여다 보기, 천천히 움직이기, 거꾸고 생각하기...결국 최소한의 방법은 쓸데없이 복잡하고 요란한 마음을, 티끌도 먼지도 고요히 사라질만큼 가라앉히고 나를 천천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리라. 그래서 내가 얼마나 맑은 거울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는 순간 어린 날 엄마의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는 내 환한 얼굴을 다시 보게 되는 것, 그것이 깨달음의 한 시작일 수도 있겠다.



마음은 보리의 나무요 (心是菩提樹)

몸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라 (身爲明鏡臺)

밝은 거울은 본래 깨끗하거니 (明鏡本淸淨)

어느 곳이 티끌과 먼지에 물들리오 (何處染塵埃)

 - 육조 혜능(六祖慧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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