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과 사랑

名詞集

by 초하책방


새벽





첫새벽에 바친다 내

정갈한 절망을,

방금 입술 연 읊조림을


감은 머리칼

정수리까지 얼음 번지는

영하의 바람, 바람에 바친다 내

맑게 씻은 귀와 코와 혀를


어둠들 술렁이며 鋪道를 덮친다

한 번도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한 텃새들

여태 제 가슴털에 부리를 묻었을 때


밟는다, 가파른 골목

바람 안고 걸으면


일제히 외등이 꺼지는 시간

살얼음이 가장 단단한 시간

薄明 비껴 내리는 곳마다

빛나려 애쓰는 조각, 조각들


아아 첫새벽,

밤새 씻기워 이제야 얼어붙은

늘 거기 눈뜬 슬픔,

슬픔에 바친다 내

생생한 혈관을, 고동 소리를


첫 새벽
한강 詩集『서랍을 저녁에 넣어 두었다』(문학과지성, 2013)






새벽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고 언제나 조용히 그리고 불현듯 다가오게 하는 것이라고

그이는 말했지요. 그것은 마치 겨울의 어느 한낮 일찍 핀 꽃잎을 걱정하다 문득 느끼게 되는

봄날의 햇살같은 것이라고 짐작했습니다.

미명(未明)이 사그라들고 환한 햇살이 온 대지의 구석구석을 채우고

나뭇잎은 투명하게 반짝거리게 만드는 순간이 우리의 기다림이 완성되는 시간이라고

당신이 이야기했죠. 언젠가 다가올 사양(斜陽)의 시간은 나중의 일로 미루고

밝게 빛나는 순간을 기다리며 기다림을 그곳에 놓아두고

미망(未忘)도 놓아두고

기억하는 것을 기억하고

사랑해야할 것들을 사랑하며 보낼

환한 한낮을 준비하는 것이 새벽이라고

그이는 또 말했었죠.

그래서 새벽에 있는 당신,

어둠에 쌓인 햇살을 들고 계신 당신,

자명(自明)한 당신.







사랑






아직 내가 서러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봄하늘 아득히 황사가 내려 길도 마을도 어두워지면 먼지처럼 두터운 세월을

뚫고 나는 그대가 앉았던 자리로 간다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하

면 서러움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


서러움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너무 빠르거나 늦은 그대여, 나보다 먼저 그

대보다 먼저 우리 사랑은 서러움이다.


「숨길 수 없는 노래2」
이성복 詩集『그 여름의 끝』(문학과지성, 1990)






서러운 것은 나고 그리고 서글픈 것은 그대의 빈 자리다. 무한한 의미로 가득차 있던 자리가 텅 비어버렸다는 것이 슬픈 일이 아니라 그 부재를 슬픔으로 치환하는 내 마음의 과정이 서러운 것이다. 그대가 사랑으로 투사되어 내 존재의 모든 의미이었던 시간을 지나 이젠 무던히 기억해내야 떠오르는 기억만이 남아버린 텅 빈 마음이 서러운 것이다.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이후에 우리 바다처럼 깊은 사랑이 다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게 이별일 텐데'* 사랑이 지나간 자리는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아픔으로 응어리진 내 靑春에 촘촘히 빛살무늬를 새겨넣으며 나를 더 단단히 대지에 뿌리내리게 다듬는 장소이자 과정이어야한다. 그래서 그 단단해진 빈 자리에 더 성숙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채워지기기를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 올리는 것이다.


*악뮤 노래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 中






送愛. 사랑이 떠나간다는 것, 그런 부재의 의미. 누군가가 나를 떠나갔다. 그 사람은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다. 남아있는 사람은 홀로 남아 떠나가는 사랑을 슬퍼한다. 슬픔은 남아있는 자의 몫이기에 그 사랑이 남겨놓은 나는, 이제는 어쩌지도 못하는 고립된 자아일 뿐이다. 세상과 이토록 철저히 단절된 적이 없었을 만큼 나를 떠나간 ‘그대’와 나의 추억이며 사랑은 모진 광풍으로 내 마음 안에 커다란 공중(空中)을 만들고 말았다. 사랑의 부재(不在). 그것은 일방적일 수 밖에 없는 사랑의 단상이다. 항상 현존하는 '나'는 부재하는 '너'로 인해 존재할 수 밖에 없고 그러므로 부재를 말한다는 것은 교환불가의 감정에 대한 불균등에 대한 인식이다. 불가분으로서 나는 그대의 영원한 연인이어야 했고 꺼지지 않는 촛불이며 시들지 않는 꽃잎이어야 했다. 이별, 죽지 않는, 혹은 지워지지 않는 사랑의 상처는 사랑이 가진 또 하나의 인과적 고통이다. 그 인과적 고통안에서 나는 독백한다, 나는 사랑으로 상처받았으니 내 모든 절규는 그대에 대한 애증이이라.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벗어둔 외투 곁에서 나 흐느꼈네
어떤 조롱도 무거운 마음 일으키지 못했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 기형도 시「빈집」중에서


사랑은 부재로부터 출발하고, 부재로 확인되며 종종 같은 의미로 종결된다. 완성된 사랑은 분리와 합일의 화해를 통해 부재에 대한 의미들을 잠시 무지의 층으로 묻어둔다. 어떻게 그 사랑의 욕망의 완전한 충족을 유지하는 가에 따라, 내 영혼의 즐거움이 또한 어떻게 사랑의 합일과 동일해 질 수 있는 지를 알 수 있게 된다. 파국은 또한 그 균형이 깨질 때 언제든, 또한 일방적으로 무지의 층에서 '부재'를 불러낼 것이다.

그런 불안,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의 분리, 그 부재에 대한 인식은 모든 사랑을 사랑이라 부르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을 만들어 준다.
여기 창 밖에서, 그 안 너머 어두운 공간, 울고 있는 나를 바라본다. 나는 '너'를 사랑했고 또 상실했으며 그런 부재 안에서 절규하고 있다. 이 심연의 고통에서 나를 단절시켜줄 수 있는 것은, 결국 남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사랑의 의미에 대한 스스로의 자각 뿐이다.
내 사랑이 끝났습니다. 사랑이 끝났다구요? 사랑도 끝이 나는 건가요? 이 물음에 대한 자각, 시작과 종결의 의미에서 사랑도 결국 벗어날 수 없다는 인식은 내가 또 다른 사랑을 꿈꿀 수 있게 한다. 충족되지 않고 내가 '종결'되지 않는 한 이 방황은 영원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나 수많은 부재를 인식하고 절망하며 수많은 불면의 밤을 지새게 될까.
그러므로 이별은 사랑의 다른 모습이며, 사랑의 실패에 대한 스스로의 고백이다. 떠나는 자와 남는 자로 역할을 나뉘겠지만, 그 고통의 크기는 양분할 수 없는 무게를 가지고 있다. 그 고통이 다른 무게를 가진다면 그것은 사랑에 대한 인식의 차이, 사랑과 사랑의 오류에 대한 질문이다. 사랑을 찾아 나는 여기까지 왔네, 라고 노래하는 시인처럼 대상과 내 사랑의 합일이 아니라 그저 습관적인 부재에 대한 일방적인 소통이거나 공생적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Enlarged egotism)일 수 밖에 없다. 다만 그것을 사랑이라 오해한 우리 혹은 '내'가 있었을 뿐.
사랑으로 이별하는 우리는 아름다운 것이다. 이별이 아름다운가? 사랑이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이 아름다운가? 사랑은 어떻게 해서 아름다울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의 답들이 곧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역설이 아닌, 극단의 정의에 대한 답들이다. 그래서 롤랑 바르트는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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