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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쿨수 Jun 12. 2023

어머니와 도쿄에서 골든 위크를 걸었다

실없는 아들과 속 깊은 어머니의 3박 4일 일본 도쿄 여행기

발권한 지 이틀 만에 어머니와 단둘이 떠난 두 번째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발권한 지 이틀 만에 어머니와 단둘이 떠난 두 번째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출발일 새벽까지 숙소 예약 등 여행 준비를 급하게 마무리하느라 정신없게 시작했지만 나름 알찬 3박 4일을 보냈다. 우연찮게 일본의 대표적 연휴인 '골든 위크'에 찾아 개인적으로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골든 위크가 시작하는 '쇼와의 날'은 원래 쇼와 천황의 생일인 4월 29일에 맞춘 기념일이었지만 한동안 '녹색의 날'로 바뀌기도 했단다. 2007년부터 '녹색의 날'은 5월 4일로 바뀌고, 다시 쇼와 천황을 기리는 '쇼와의 날'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재위했던 천황을 기리는 날에 일본 여행을 하는 게 약간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대단한 애국자는 못 되지만 그 시절에 고초를 겪은 조상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부끄러웠다. 일본의 문화와 여행을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역사와 정치에 대한 고민 혹은 숙제는 여전하다. 무지의 죄인으로서 막연하게 이웃나라와 포용하며 미래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어쨌든 나는 어머니와 함께 또 한 번 일본을 찾아 참 행복했고 그야말로 황금연휴를 보넀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장소들을 나열해 본다.



1. 센소지

센소지는 도쿄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다. 사찰의 규모와 명성에 비례하는 엄청난 인파에 감탄했다. 628년 스미다강에서 어부 형제가 물고기 대신 낚은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기 위해 건립한 곳으로 아사쿠사관음사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곳곳에서 많은 이들의 간절히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센소지 본당에서 입구에 이르는 길 양옆엔 앞서 지나온 길이자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상점가 나카미세도리가 있다. 주로 기념품이나 주전부리를 파는 듯했다. 긴 세월을 넘어 아직도 살아 숨 쉬는 거리엔 사람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숙소가 근처라 여행 마지막 날 밤에도 갔다. 조명이 켜지고 사람이 줄어든 센소지는 새삼 '절'로서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한적한 도시형 사찰이 뜻밖의 목가적 풍경을 연출했다.


2. 우에노 공원

우에노역 바로 옆에 위치한 우에노 공원은 벚꽃 명소로도 유명한데 무려 1873년에 일본 최초로 공원으로 지정된 다섯 곳 중 하나라고 한다. 긴 시간을 증명하듯 아름드리나무들이 도시와 공원을 구분했다. 행사가 있는지 초입에는 십 대로 보이는 여러 무리가 푸르르게 무성이고 있었다. 청춘을 뒤로한 채 천천히 산책하며 도심 속 녹지의 여유를 즐겼다.

공원을 중심으로 국립서양미술관, 국립과학박물관, 도쿄국립박물관 등 주요 문화 공간이 이어졌다. 오가는 이들과 자연이 자아내는 신록이 눈 부시게 아름다웠지만 그 가운데 노숙인의 자취로 보이는 것들은 가슴 한편을 무겁게 했다.

산책 후 잠시 앉아 쉬며 엄마와 함께 지나치는 사람들을 바라봤는데, 흐르는 세월을 관망하는 듯한 짧은 시간이 나를 묘하게 토닥였다. 같이 올 수 있어서, 함께 걸을 수 있어서 새삼 감사하고 행복했다.


3. 아키하바라

아키하바라는 원래 전자상가를 중심으로 성장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예전의 용산 같은 느낌일까? 지금은 게임, 애니메이션, 만화 등을 주제로 오타쿠 문화의 거점이자 서브컬처의 성지가 되었다고 한다. 거리에 들어서자마자 특유한 공간감이 느껴진다.

게임, 애니메이션을 주제로 한 광고가 건물 외벽, 지나치는 트럭 등에 가득했다. 거리 양옆을 가득 채운 메이드들의 호객 행위는 특히 문화 충격이었다. 문화인 줄 알지만 뭔가 쑥스러워 어금니를 깨물고 외면했다. 애니메이션 굿즈 전문점인 애니메이트 아키하바라도 들어가 봤다. 무려 1층부터 7층까지 다양한 굿즈로 채워져 있었다. 체인소맨, 귀멸의 칼날 등 익숙한 애니가 꽤나 많아 반가웠다. 아쉬웠던 점은 개인적으로 신카이 마코토나 호소다 마모루 작품의 굿즈를 사고 싶었는데 그런 건 없더라. 내가 못 찾은 걸 수도 있지만...* 아무튼 둘러보며 진심에 기반한 불광불급의 긍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더불어 시장의 규모와 탄탄함이 체감됐다.

드래곤볼, 포켓몬스터, 원피스 등 유년기에 꿈을 키워주던 오래된 벗들을 마주할 땐 새삼 반가웠다. 알게 모르게 시절을 빚진 이야기들이 참 많다.

개인적으로 도쿄 여행 중 정말 인상 깊은 공간 중 하나였다. 미디어를 통해 많이 접해본 곳이었지만 직접 와 보니 색다른 이질감을 즐겁게 느낄 수 있었다. 애니메이션은 나름 가끔 보는 편인데도 이곳은 그야말로 이세카이, 다른 세계 같았다. 각자 애호하는 서브컬처가 결국 모든 삶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선 스쳐가는 모든 이들과 연대감 혹은 동질감을 느꼈다.


4. 신주쿠 쿄엔

신주쿠, 시부야, 이케부쿠로를 도쿄의 3대 부도심으로 꼽는다는데 정말 크고 유동인구가 많았다. 그 한가운데 신주쿠 쿄엔(신주쿠 공원)이 있다.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엄청난 크기의 녹지다. 1906년 황실 정원으로 조성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 민간에 개방되었다고 한다. 일본 정원, 영국식 정원, 프랑스식 정원이 각각 꾸며져 있는데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 '언어의 정원'의 주 무대이기도 하다. 그의 처돌이(?)로서 더 설렜다. 원래 500엔의 입장료가 있는데 쇼와의 날 기념으로 무료로 입장했다.

휴일인 데다 무료 개방까지 겹쳐 그런지 내가 영상에서 봤던 한적한 모습과는 다르게 엄청 북적였다. 하지만 언어가 넘쳐흐르는 정원의 모습도 어떤 면에선 나름 한가해 보인다. 너른 공간에 자리한 자연과 낙낙한 마음이 모여 자아내는 여유가 있었다. 

마침내 극장판 애니메이션 <언어의 정원> 속 정자를 마주했을 땐 정말 행복했다. 어머니 말씀으론 여행 중 내가 가장 설레하고 흐뭇해했다고 하셨다. 장마였던 극 중 날씨와 다르게 맑은 하늘이었지만 왠지 여기 어딘가 두 주인공, 아키즈키 타카오와 유키노 유카리가 있을 것만 같다. 개인의 삶에 생명력을 지니고 살아남은 이야기는 이렇게 어떤 공간과 만났을 때 더 풍성해진다. 


5.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

시부야역 인근에는 그 유명한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가 있다. 한 번에 천 명 이상이 함께 건넌다는 데 진짜 사람이 많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장관이다. 그 바로 옆에 하치코 동상이 있다. 반려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거의 10년을 시부야역으로 마중 나온 하치 공을 기리기 위한 조형물이다. 자연스레 사랑이 형과 별이를 떠올렸다. 항상 보고 싶지만 이럴 때면 괜히 더 울컥한다. 지극한 인간적인 시점으로 충견이라 불린, 간절한 기다림이 녹록지 않았을 한 견생에도 내심 뒤늦은 미안함을 전했다.


6. 이케부쿠로 킷사텐

킷사텐은 커피, 홍차 등 음료와 함께 가벼운 식사를 판매하는 일본식 찻집을 말한다. 개인적으로 한국식 경양식을 좋아하고 일본 드라마 하츠코이에서 주인공들이 나폴리탄 파스타를 먹는 모습을 보고 본토에서 먹어 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이케부쿠로에 위치한 오래된 킷사텐 '타카세'에 갔다. 처음엔 어르신 몇 분을 비롯해 서너 팀만 있었는데 오픈 시간이 임박하니 갑자기 사람이 우르르 많아졌다. 어머니와 나는 오픈 때 바로 입장해 운 좋게 창가에 앉았다. 비 내리는 도시를 내려다보며 근본 메뉴인 나폴리탄 파스타, 함박스테이크, 멜론 크림소다를 맛있게 먹었다. 어머니도 너무 행복해하셔 정말 뿌듯했다. 많은 이들이 세대에 상관없이 계속 이곳을 찾는 이유는 결국 그런 순간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


7. 릿쿄대학

윤동주 시인이 잠시나마 수학했던 릿쿄대학에 갔다. 예전에 선생님의 발자국을 좇아 교토 도시샤 대학에 가기도 했었는데 덕분에 '나에게 주어진 길'을 찾을 때가 참 많다. 담쟁이넝쿨과 나무에 둘러싸여 푸르른 교정은 순수한 청년이 한 학기를 머물며 '쉽게 쓰여진 시'를 어렵게 써낸 곳이다. 힘들게 쓰인 시를 소리 내어 읽어 보고, 젊은 시인의 마음을 헤아리며 홀로 걸었다. 어머니는 벤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셨다. 서로 다르게 좋았던 장소로 마음에 남았다.


8. 오다이바 유니콘 건담

오다이바는 도쿄만에 있는 대규모 인공섬이다. 1800년대 방어 목적으로 만든 포대였으나 이후 조금씩 개발되어 지금 포대는 전부 매립되고 상업, 거주, 레저 등의 복합 지역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온천 테마파크 오에도온센모노가타리와 오다이바 대관람차 등 많은 지역 명소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럼에도 도쿄만 북쪽과 오다이바를 연결하는 레인보우 브릿지와 오다이바 자유의 여신상 등 볼거리가 여전히 많았다. 특히 쇼핑몰 다이버 시티 도쿄 플라자 앞에는 1:1 비율로 제작된 실물 크기 유니콘 건담이 있다. 건담을 보며 다시 한 번 콘텐츠에 대한 진심과 현실로 구현하는 열정 그리고 그를 받치는 시장의 규모를 느꼈다.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 같은 생동감은 묘하게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을 떠올리게 했다. 



어머니와 단둘이 떠났던 첫 번째 여행과 두 번째 여행 사이 어느새 5년이 넘게 흘렀지만 아들의 실없음과 어버이의 사랑은 여전했다. 어무이는 똑 닮은 얼굴을 비롯해 따뜻한 심성과 문학적인 감수성 등 참 많은 것을 물려주셨다. 반려견 사랑이 형이 무지개다리를 건너기 전에 늙은 개와 보폭을 맞추는 일이 몹시 그리울 거라는 걸 예감한 적이 있는데... 예견된 언젠가에 이르러 맞닿은 평생으로 발걸음을 맞춰 주는 이와 같이 걷는 시간은 더 남다르고 값졌다. 먼저 곤히 주무시고 계신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다 삶 앞에 두루 가혹한 세상이 한 세대를 앞선 여성에게 얼마나 매서웠을지 가늠하다 문득 먹먹해지기도 했다. 한때 나보다 어리고, 못지않게 어려웠을 그녀의 여정이 감히 고맙게 느껴졌다. 그런 나의 어머니와 도쿄를 따뜻한 늦봄에 찾아 언어의 정원부터 윤동주 시인의 교정까지 연대하며 향유할 수 있어 정말 행복했다. 그야말로 골든 위크에 마주한 골든 데이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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