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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쿨수 May 14. 2022

오천 자전거길 위에서 찾은 삶의 의미와 고향 친구들

습관성 사서 고생 증후군 덕에 누린 청춘과 신록

어떤 여행은 어떤 이유로 망설이다가 강한 직감에 떠밀려 시작된다. 한 걸음 내딛는 마음으로 또 한 번의 자전거 여행을 결심했다. 두 바퀴의 속도로 마주하는 낯선 세상이 주는 자유로움을 맛봤기에 가슴 한편 늘 그리움이 있기도 했다. 더불어 속을 시끄럽게 하는 몇몇 일들이 방랑벽을 일깨워 줬다. 오랜만에 자전거 여행을 떠나는 날, 습관성 사서 고생 증후군(?)이란 이름의  유서 깊은 지병(?)을 인정했다. 막상 떠나려니 동이 터 오는 동네 풍경이 이미 충분히 아름답다고 느껴졌지만 부지런히 페달을 밟았다. 

개인적으로 자전거 여행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집과 목적지 사이를 오가는 일이 정말 큰일이라고 생각한다. 전철과 버스를 타고 증평시외버스터미널을 거쳐 괴산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약간의 안도감과 설렘을 느끼며 수수한 터미널과 시내를 지났다.

처음 와보는 곳이지만 하천을 따라 이어지는 아름다운 초록빛 길이 왠지 낯익다. 어마어마한 수의 날벌레들과 대면하며 첫발의 기운으로 달렸다.

10시 40분 즈음 이번 여행 오천자전거길의 첫 인증센터인 괴강교 인증센터에 도착했다. 예전에 서울에서 부산으로 향할 때 행촌교차로 인증센터는 인증 도장을 미리 찍었다. 그게 벌써 7년 전이다. 첫 직장 합격 소식을 급작스럽게 들은 뒤, 생애 첫 출근을 코앞에 두고 우발적인 자전거 여행을 떠났었다. 그때의 경험은 초심과 맞닿아 선명한 인상으로 남았다. 시기도 딱 이맘때였던지라 여러모로 그때의 추억이 많이 떠올랐다.

곳곳에 신록이 넘쳐나는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눈요기만으로도 엄청난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좀 달리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 되었다. 근처에 유일한 식당으로 보이는 화곡반점에 가서 간짜장을 먹었다. 무료로 곱빼기가 가능해 좋았다. 지역 주민들의 사랑방 같은 곳이었는지 사람들이 계속 들어왔고 뒤 테이블에서는 멧돼지 때문에 고추 농사를 망쳤다는 할아버님의 푸념이 들려왔다. 안타까움과 별개로 여러모로 정겨움이 가득해 포근했다.

배를 채우고 달리다 보니 몸이 좀 무거웠다. 살짝 지치려고 할 때 마주한 모래재 다운힐은 정말 기가 막히게 신났다. 자전거를 타면 매번 제일 많이 깨닫는 것 중 하나가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다는 거다. 그 모든 건 하나의 길이기도 하다.

신나게 달리다 보니 금세 증평군에 도착했다. 내겐 다소 생소한 지명이었는데 시외, 시내 모두 정말 아름다웠다. 달리는 내내 감탄했다.

오후가 되어서야 백로공원인증센터에 도착했다. 요즈음 평소에 자전거를 잘 타지 않는데 뜬금없이 장거리를 가려니 확실히 속력이 많이 떨어진다. 예전엔 젊음으로 덤볐는데 확실히 예전 같진 않다. 그러던 와중에 자전거 핸들 고무그립이 삭다 못해 찢어져 조금 난감했다. 중고로 데려온 지도 8년이니 그럴 만도 하다. 내 키에 맞지도 않는 작은 자전거에게 너무 험한 생을 겪게 하는 건 아닌지 괜히 미안해진다. 어느새 고물이 다 된 자전거지만 함께한 시간이 있기에 내게는 보물이다. 그냥 그립을 꼭 쥐고 뜻밖의 전완근 단련을 하며 열심히 달렸다.

이 손 놓지 마...*

증평에서 청주까지 가는 길은 상대적으로 단조로운 풍경이 이어졌다. 거의 소의 축사 혹은 밭이 대부분이었다. 몸이 점점 지치는데 단순한 길이 아득하게 느껴져 더 힘들었다.

기운 내 무심천인증센터에 도착했다. 원래 계획은 청주에 사는 친구와 점심을 먹거나 커피 한잔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늦었다.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했던가, 늦은 김에 하루 신세 지고 자고 가기로 했다. 고마운 친구 덕에 여러모로 편의를 누리며 첫날을 마무리했다.

이튿날 아침, 호기롭게 오늘 공주 혹은 부여까지 가볼 것은 다짐했다. 한 치 앞도 모른 채...*

친구가 함께 갈아준 그립. 고맙다 친구야!

아침의 무심천변엔 출근하거나 운동하는 청주 시민들이 꽤 많았다. 여행 중엔 타인의 일상이 더 잘 보이고, 그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느낌이 꽤 짜릿하다. 흐드러지게 핀 냇가의 이팝나무 꽃들을 보며 작년에 친구들과 꽃은 없고 벌레만 많을 때 왔던 걸 떠올렸다. 그때도 나름 예뻤지만 꽃이 만발한 길은 정말 아름다웠다.

오천자전거길의 다음 인증센터는 합강공원인증센터이지만 효율적인 동선을 위해 금강자전거길에 있는 대청댐인증센터에 먼저 가기로 했다. 청주 시내를 지나니 차도 옆 자전거길이 이어진다. 

맑은 하늘 아래 평탄한 길을 따라 즐겁게 달리다 대청댐에 가까워져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조금 힘은 들었지만 고운 풍경을 즐겁게 구경하며 가다 보니 금세 거대한 둑이 내려다보인다.

그렇게 마주한 마지막 다운힐에서 들떠 조금 속력을 높였다. 기분 좋게 바람을 가르다 반대편에 차가 지나가 얼핏 살피고 핸드폰에 뜬 알람을 무심결에 잠시 보고 정신 차리니 그새 붙은 속력으로 조향이 안됐다. 급브레이크를 잡았지만 자전거가 밀리며 결국 가드레일에 자전거 그리고 팔과 다리를 부딪히며 간신히 세웠다. 잠깐의 방심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다. 다행히 자전거는 생각보다 멀쩡했고 팔다리도 겉으로 보기엔 괜찮았다. 넘어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팔과 무릎이 욱신거렸지만 팔 토시만 조금 찢어졌고 당장 눈에 띄는 상처는 없어 놀란 맘과 몸을 달래며 다시 달렸다. 

금방 대청댐 인증센터에 도착했다. 근처에서 잠깐 쉬다 팔의 통증이 심상치 않아 팔 토시를 벗기니 아뿔싸 누가 봐도 봉합이 필요해 보이는 외상에서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억지로 마음을 가다듬으며 119를 부를까 잠시 고민하다 그정도 응급 상황은 아니고 자전거는 탈 수 있으니 근처 병원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예상하지 못한 사고와 상처여서 깜짝 놀랐는데 바로 침착하게 해결책을 고민하는 모습이 스스로 어른같이 느껴졌다.

다쳤지만 침착한 나 제법 괜찮아요...*

그렇게 신탄진의원에 12시 30분에 도착했는데, 딱 그때부터 점심시간이었다. 다행히 대기실은 열려있어 꼬박 1시간을 기다려 세 바늘 꿰매고 왔다.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이러고도 조금 더 강행했을 것 같은데, 더 이상 여행은 무리라 판단되어 차편을 알아보며 고민했다. 오늘 올라가도 평일이라 지하철에 자전거를 실을 수 없고, 대전복합터미널까지 가자니 약 10km 정도를 이동해야 했다. 바로 옆에 신탄진역이 있어 내일 아침 기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숙소를 잡고 쉬다 급작스레 퇴근하고 택시로 와 준 친구를 만나 진지한 고민과 가벼운 농담을 솔직하고 즐겁게 나눴다. 금요일 저녁이라 피곤했을 텐데 짧지 않은 거리를 다녀가 너무 고마웠다. 덕분에 뜰 뻔한 시간이 또 다른 여행으로 채워졌다.

계획대로면 오늘 군산까지 가는 거였는데 인생 참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다. 가려던 목적지엔 닿지 못했지만 그 덕에 생각지 못한 곳에 이를 수 있었다. 자전거 사고의 특성상 정말 크게 다칠 수도 있었기에 이 정도로 돌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도 어렵게 낸 시간이었고 날이 참 좋아 아쉬웠다. 딱히 뭘 얻으려고 떠난 여행은 아니었지만 당분간 잃은 건강이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두 바퀴로 마주한 길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다시금 타성에서 벗어나도록 도왔다. 일상적인 세계 밖 세계상 나를 내던지며 이런저런 환기가 많이 됐다. 비록 뜻밖의 사고로 생각보다 이르게 여정을 마쳤지만 낯선 도시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고향 친구와의 만남이 반가운 위로로 남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상처가 계속 쿡쿡 쑤셨지만 덕분에 요즈음 나를 괴롭히던 마음의 통증이 생각보다 별거 아니란 걸 깨닫기도 했다. 역시나 젊어서 산 고생은 치른 값보다 얻은 게 훨씬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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