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를 위해 어른다운 행동이 필요하다.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30일 새벽 속보에서 확인된 150여 명의 사상자 소식.
'이태원에서? 왜?'
어떻게 이런 일이 서울 도심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
그 젊음이 안타깝고, 어른으로서의 미안함에 지금도 힘든 시간이다.
이번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들이 우리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하고 있는지 우리는 잘 들어야 한다.
이들의 안타까운 희생이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편향되는 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
이들을 지켜주지 못한 어른으로서 어른다운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 공감하지 못하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부모 교육을 하다 보면 아이와 멀어지는 부모의 유형은 공감 없는 부모라는 점에 많이들 인정한다.
길을 걷다 넘어진 아이.
엄마는 조심해서 걸어라 미리 당부했지만.. 넘어져 무릎이 까져 우는 아이를 보고
"그러길래 왜 그렇게 걸어가는데? 엄마가 조심하라고 했지? 넘어지는 건 당연하지!"
라고 훈계부터 하는 부모는 아이의 외면을 받기 쉽다.
넘어져 아픈 아이의 마음을 같이 위로하고 달래 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어른이다.
부모 말을 듣지 않은 아이를 야단치고 싶은 마음도 들 수 있지만, 부모는 아이의 마음을 먼저 공감한다.
왜냐하면 넘어진 사건은 아이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같이 감정을 느끼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대화했을 때 더 좋은 방식의 해결책들이 나온다. 서로 감정 상해서 거절하거나 마음을 닫지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는 어른다운 공감이 필요하다. 놀러 갔다가 다친 사람이니 그들의 책임이다? 이 많은 희생자들이 참사는 그들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어 었다. 지금처럼 유지되었다면 나와 당신 모두의 일일 수도 있다. 희생자와 그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희생을 통해 그 위험을 알려주었다. 아픔을 함께 나누고 공감해야 반복된 사건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 이태원에 간 그들의 잘못이면 우리 사회는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으니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공감하자. 그래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2. 피해자 유발론 프레임에서 벗어나자.
성희롱 예방 교육을 듣다 보면 "피해자 유발론"이라는 단어를 접하게 된다. 피해자가 피해당할만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단정이다.
성폭력 피해 여성에게
"옷이 왜 이렇게 야해?"
"밤늦게 술 마시고 다녔잖아"
피해 여성에게 피해를 당할 만도 하다는 프레임을 씌우는 것이 피해자 유발론이다.
여자가 밤늦게 술 마시고 다니면 사고를 당해도 된다는 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관점이다.
이런 관점으로 "놀러 가다 다친 거잖아"라는 말을 하는 분들에게 묻고 싶다. 도대체 어느 시절에 사는지 말이다.
언젠가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건에서 박인수 씨의 사건을 접했다. 1955년 1년에 70명의 미혼여성과 혼인을 빙자해 만남을 가진 한국판 카사노바의 사건이다. 이 남성 무죄다. 이유는 박인수 씨가 관계한 70명의 여성중 처녀는 2명밖에 없었다는 것이 무죄로 판결된 결정적 이유이다. 법은 정숙한 여인만 보호한다는 1955년의 판결. 지금 보고 있자면 이해하기 어려운 판결이다. 법은 모든 사람 앞에 공정하다. 자발적으로 놀러 간 사람도 안전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최소한 그러길래 왜 놀러 갔어? 이태원에 간 사람이 잘못이지.. 등의 피해자 유발론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지금 2022년에 살고 있다.
1: 29: 300 하인리히 법칙이 생각나다.
1번의 대형사고는 29번의 사고로 이어질 뻔했던 징후와 300번의 경미한 징후가 있었다는 실패의 법칙이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