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개구리 같은 아들을 키우면서 느끼는 것들
전래동화 가운데 '청개구리'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엄마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엄마의 말에 반대로만 이야기하는 청개구리의 이야기입니다. 아들 청개구리는 엄마가 동쪽으로 갈까 하면 서쪽으로 가고, 윗동네에서 놀고 오라고 말하면 아랫동네에 가서 놉니다.
엄마 청개구리: 너는 왜 제대로 울지 않니? 네 목소리가 개구리 답지 못하구나. 나를 따라 해보거라. 개굴개굴
아들 청개구리: 굴개굴개
엄마 청개구리: 아니 이놈이! 너 때문에 속 터져 죽겠네.
엄마 청개구리는 매일 야단을 쳤지만 아들 청개구리는 마음대로 행동했고, 엄마 청개구리는 결국 앓아눕게 됩니다.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았던 엄마 청개구리는 아들 청개구리를 불러 양지바른 곳에 묻지 말고, 꼭 강가에 묻어달라고 이야기합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양지바른 곳에 묻어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며칠 후 엄마 청개구리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자신의 행동을 뉘우친 청개구리는 어머니 마지막 유언을 들어드리고자 강가에 어머니를 묻어드리지요. 그 후 비가 오는 날이면 강가의 어머니의 무덤이 걱정되어 '개굴개굴' 울고 또 울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들 청개구리의 모습을 보면 낯설지 않습니다. 마치 첫째의 모습을 보는 것 같거든요. 말을 하면 반대로 이야기하고 반대로 대답을 하곤 하지요. 마치 아들 청개구리 같습니다.
나: “훈아 밥 먹을까?”
훈이: “밥 안 먹을까?”
나: “오늘은 밖에 나갔다가 일찍 들어오자~”
훈이: “오늘은 밖에 나갔다가 안 일찍 안 오자~” (부정의 부정은 강한 긍정이러하던데 이건 문법도 안 맞다.)
심지어 말들도 거꾸로 하고 책 이름도 거꾸로 이야기하곤 합니다.
훈이: “빠아~” , “마엄~” “니머할~”, “지버아할”
나: "훈이~! 그게 뭐야~ 훈이가 다 거꾸로 말해버렸잖아"
이러면 재미있어 깔깔거리며 넘어갑니다.
'청개구리 전래동화'가 괜히 나온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옛날에 아이들도 오늘날과 다르지 않나 봅니다. 흔히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고 자기 고집이 생기는 시기의 힘든 마음을 담아 이 시기를 '미운 네 살'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논리도 통하지 않고, 자기의 고집이 생기는 데다, 떼도 늘어나니 육아의 난이도도 훨씬 늘어납니다. 아이들이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으니 감정소모도 심하고 더 쉽게 지치지요. 도대체 왜 저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이야기하고 떼를 쓴다는 건 자신의 주장과 생각이 생기는 신호입니다. 오히려 부모의 말에 고분고분 순종적으로 행동하는 아이가 있다면 위험한 신호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는 게 아이가 잘 자라고 있다는 신호인 셈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오죽하면 '미운 네 살'이란 이름을 만든 심정을 이해는 하겠으나, 자아가 생기고 있는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하면 밉다기 보단 '성장하고 있는 네 살'이 아닌가 싶습니다.
흔히 '부모님의 말을 잘 듣자.',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말씀을 잘 듣고 효도하자.'는 의미에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곤 하지요. 어릴 적에는 별생각 없이 들었던 이야기였지만, 부모가 되어 오랜만에 다시 들어본 청개구리 이야기는 무언가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첫째, 엄마 청개구리는 아들 청개구리의 생각을 물어보지 않고, 엄마 청개구리 말만 들을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엄마 청개구리는 왜 동쪽으로 가야 하는지 이유를 제대로 이야기해주지 않습니다. 아들 청개구리에게 어떻게 할 건지 물어보지도 않아요. 선택지를 주지 않습니다.
'동쪽으로 갈래? 서쪽으로 갈래?'처럼 '네 마음대로 선택해.'라고 하는 건 좋은 선택지가 아닙니다. 분명 엄마 개구리가 생각한 동쪽으로 가야 하는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그럼 엄마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함께 이야기해주면 좋겠지요.
엄마 개구리: 동쪽으로 가는 길이 서쪽으로 가는 길보다 좀 더 안전하단다. 동쪽으로 가야한단다.
만약 동쪽으로 가도 되고 서쪽으로 가도 된다면 아이에게 선택지를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합니다.
엄마 개구리: 동쪽으로 갈 수도 있고 서쪽으로 갈 수도 있단다. 넌 어느 쪽으로 가고 싶니?
왜 서쪽으로 가고 싶은지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부모가 허용가능한 범위(용납가능한 범위)에서 아이가 선택하도록 했다면 좋지 않았을까요?
둘째, 엄마 청개구리는 아들 청개구리에게 죄책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엄마 청개구리는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지 않는 아들 청개구리에게 '속 터져 죽겠네.', '너 때문에 못살겠다.'며 이야기를 하곤 했지요. 그 말을 들은 아들 개구리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분명 자신의 행동 때문에 엄마가 많이 힘들어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러곤 병을 앓고 죽어버리지요. 아들 청개구리는 비가 오는 날만 되면 엄마 생각에 개굴개굴 울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칩니다. 과연 아들 청개구리는 남은 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엄마의 말과 행동에 청개구리는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갖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셋째, 엄마 청개구리는 아들 청개구리를 믿지 않았습니다.
엄마 청개구리는 죽기 전까지도 아들 청개구리를 믿지 않습니다. 아들을 믿지 못한 엄마 청개구리는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강가에 무덤을 만들어 달라고 하지요. 물론 아들 청개구리가 엄마 청개구리에게 믿음을 주진 않았지요. 엄마 청개구리 말을 듣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부모는 아이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도 분명 부모의 마음을 느낄 거예요. 부모님이 나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요. 내가 내리는 선택에 부모님은 나를 믿고 지지해 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청개구리 같은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 개구리도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오죽했으면 병까지 얻어서 죽을 정도였으니 그렇게나 고생을 한 엄마 개구리 또한 안쓰럽습니다.
엄마 개구리도 아들개구리를 많이 사랑했습니다. 그렇기에 아들 개구리는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생전 엄마 개구리의 사랑을 느끼고 울음을 터뜨린 것이겠지요.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듯합니다. 사랑하는 마음과 더불어 아이를 나의 소유물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는 자세가 필요한 듯합니다. 사랑의 표현 방법이 올바르지 못하다면 사랑하는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니까요.
아이들은 부모의 무한한 사랑을 먹고 자란다고 하지요. 무한한 사랑, 그리고 자신이 내리는 선택에 대한 존중을 통해 아이들은 건강한 자존감을 형성하고 이 세상을 살아감 힘을 얻어 가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