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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도서관 가는 길

도서관 가는 길 아이에게서 배운 교훈

by 쿠리

28일 일요일 아침, 오랜만의 단비가 조금씩 내리며 목말랐던 땅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도서관까지 가는 길

아침에 일어난 첫째가 일어나자마자 도서관에 가자고 이야기를 합니다. 육아휴직을 하면서 아이와 동네산책도 할 겸 집 근처에 있는 도서관을 자주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는 이런저런 일들이 겹치면서 도서관에 가질 못했던 탓인지 첫째가 오랜만에 도서관에 가보고 싶었나 봅니다.


<1차전>

도서관까지는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지만, 밖에 비가 조금씩 오기에 훈이에게 차를 타고 가자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 "훈아 도서관까지 차 타고 가자~"

훈이: "왜?"

나: "지금 밖에 비가 오잖아. 비 올 땐 차를 타고 가면 편하게 갈 수 있어."

훈이: "걸어서 가자. 걸어서 가고 싶어."

나: "비 오는데 걸어서 가면 옷도 젖고 힘들어. 차 타고 가자~"

훈이: "걸어서 가자. 왜 차 타고 가자고 그래. 걸어서 가고 싶어"


<2차전>

그런데 훈이는 기어코 걸어서 가고 싶다고 합니다. 한번 생각하면 해야 하는 첫째의 의지를 꺾기가 참 어렵습니다. 이제 38개월, 한참 그럴 시기이기도 하고요. 생각해 보니 걸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우의와 장화를 준비했습니다.


나: "훈아, 우의랑 장화신자."

훈이: "왜?"

나: "밖에 비 오잖아. 비 올 땐 우의랑 장화를 신는 거야."

훈이: "장화는 안 신고 운동화 신을 거야."

나: "장화 신으면 훈이 양말도 안 젖고 더 편하게 갈 수 있어."

훈이: "장화 안 신을 거야. 양말에 운동화 신자."


우의는 입었지만 장화는 절대 신지 않겠답니다. '신발이 젖어 불편함을 느껴보아야 배우는 게 있겠지' 싶어서 또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훈이가 마음에 드는 운동화를 신고 도서관으로 출발했습니다.


<3차전>

도서관으로 가는 길, 비가 오니 빨리 도서관까지 가야겠다는 생각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장 빠른 길로 훈이를 안내합니다.


나: "훈아~ 이쪽으로 가자."

훈이: "왜?"

나: "이쪽으로 가면 도서관으로 빠르게 갈 수 있거든."

훈이: "OO아파트 지나서 가자."

나: "OO아파트 지나서 가면 한참 돌아서 가야 돼. 지금 비가 오는데 빨리 도서관으로 가면 좋지 않을까?"

훈이: "OO아파트 가고 싶어. OO아파트 지나서 가자."


결국 OO아파트를 거쳐 도서관까지 돌아서 가는 길로 가기로 했습니다.

비 오는 날 도서관까지 가는 길이 이렇게 험난할 줄이야. 첫째가 저의 마음대로 잘 따라와 주지 않으니 짜증 나는 마음이 솟구칩니다. 피곤하다 보니 더 쉽게 짜증이 났나 봅니다. 첫째는 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기가 원하는 대로 OO아파트를 지나서 가니 기분이 좋습니다. 짜증도 내지 않고 떼도 쓰지 않습니다. 기분 좋게 웃으면서 걸어갑니다. 그렇게 웃는 아이를 보니 이것 또한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도서관을 가자는 첫째의 말에 '어떻게 하면 도서관까지 가장 빠르고, 편안하고, 효율적으로 갈 수 있지?'만 머릿속에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걸어가는 것도, 비 오는 날 운동화를 신는 것도, 도서관까지 멀리 돌아서 가는 것도 다 비효율적이고 불필요한 행동이라고 마음속으로 결론짓고 있었습니다.

저는 빨리 목적지에 다다르는 것에만 신경을 썼습니다. 하지만 첫째는 목적지까지 다다르는 과정이 중요했습니다. 첫째에겐 목적지까지 얼마나 빠르게 도착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목적지까지 즐기며 가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OO아파트를 지나며 105동, 106동, 107동 아파트가 몇 층까지 있는지 구경하기도 하고, 화단에 있는 나뭇잎도 만져보고 빗물이 고인 웅덩이에도 들어가 봅니다. (맙소사...) 신발이 젖었지만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보고 있는 어른이 불편할 뿐이지요. 또 이런 경험들이 쌓여 나중에는 장화를 신자는 말을 하겠지요?


비가 오는 날의 청량하고 맑은 공기와 우산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느껴집니다. 비 오는 날 이렇게 우산을 쓰고 첫째의 걸음에 맞춰 산책을 하고 있으니 또 이것도 정말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가 내 의도대로 따라주지 않는다고 짜증 내고 마음속으로 투덜거렸다면, 이런 행복한 느낌도 느낄 수 없었겠지요. 짜증을 낸다고 상황이 변하지 않습니다. 괜히 기싸움에 서로 마음만 상할 뿐이지요.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들이 가득한 것 같습니다.


길고 긴 여정 끝에 무사히 도서관에 도착했습니다. 조금 돌아서 왔지만 도서관까지 오는 길은 훈이에게도 저에게도 행복했습니다.


곰돌이 푸의 말이 떠오릅니다.

"매일 행복하진 않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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