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직한 두통으로 불 꺼진 방에 누워 있는데, 여러 해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났다. 여덟 식구(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엄마, 우리 삼 남매)의 가장이셨던 아버지는 젊었을 때부터 건강이 안 좋으셨다. 아버지의 열 명의 형제들이 병으로, 전쟁통에 돌아가시고 자식이라고는 아빠와 고모 한 분만 살아남으셨다. 그런 연유로 할머니ㆍ할아버지는 남은 외아들을 귀하게 여겨 보약이란 보약은 다 지어 먹이셨고 아버지는 지나친 약 복용으로 간장이 다 상하셨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아버지를 떠올리면 늘 배를 움켜쥐시고 쪼그려 앉아 신병을 비관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셔서 다니는 학교를 그만두거나, 먹고 살 걱정을 해야 할까 봐 항상 노심초사했다. 사춘기를 겪을 여유는 없었다.
아버지는 우리 삼 남매에게 무뚝뚝하시고 사랑 표현이 인색하시던 분이지만, 딸들한테는 그래도 종아리 한 번 안치고 키우셨던 분이다.
오빠한테는 오빠한테 거는 기대만큼 냉혹했고 딸들한테는 별 기대가 없어서 그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점수 나쁜 성적표를 가져와도 ''허허''웃으셨다.
몸이 아프셔서 그런지, 아니면 일찍 형제들의 죽음을 대하고 부모의 과보호를 통해 성장하셔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극히 우울하시고, 신경질적인 예민한 성격이셨다. 내가 글짓기로 상을 받아왔을 때도 표정은 웃으시면서도 ''네 까짓게 별걸 다했구나.''하고 외면하셨다. 그때는 서운하고 ''네 까짓게''라는 말이 듣기 싫었지만 지금은 그래도 아버지의 서투른 사랑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스물다섯 봄에 결혼을 했다. 친구들 중 젤 이른 나이에 한 결혼이다. 젊었을 때만 해도 아버지를 이해하고 가엽게 여기는 마음보다는 아버지의 부정적인 말이, 집안의 무거운 기운이 못 견디게 싫어 빨리 독립했다. 그러고 보니 생전에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도, 손 한 번 잡아드리지 못했다. 내 결혼식 날, 눈물을 보이시던 아버지...
그때는 그 눈물마저 외면하고 나만의 행복한 둥지를 만들고 싶은 나는 이기적인 딸이었다. 그 아버지가 오늘따라 유난히 그립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병약하고,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는 나를 걱정하셨던 아버지. 삼 남매 중 아빠를 제일 많이 닮은 나를 어여삐 여기신 아버지. 철이 이제 드는 걸까? 인생길을 구비구비 걷다 보니 그분의 녹록지 않은 삶도, 우릴 향한 크신 사랑도 보인다.
아버지, 이제 당신의 손주가 서른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그 눈물의 의미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부디 편히 영면하시길 당신께 이 딸이 꽃 한 송이 바칩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