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쁜손 Jun 04. 2021

부추전에 맥주 한잔의 행복.

 며칠 전 조카들 중간고사 성적표가 나왔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이 풀이 죽었다. 동생이 성적표 가지고 아이들을 야단치는 성격은 아니지만 동생은 동생대로 속상해서 끙끙 앓고 아이들은 공부엔 관심 없어도 막상 결과로 받아보니 충격이 심했는지   집안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기가 죽은 이쁜 내 조카들과 동생을 위해 특별 메뉴를 고심하다 닭고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닭고기 버섯 부추 덮밥을,  동생에게는 덮밥에 쓰고 남은 부추에 오징어를 송송 썰어 넣고 부추전을 해주려 집 냉장고를 뒤져 얼린 오징어를 챙겨 들고 동생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날씨가 잔뜩 흐린 것이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다. 운치 있는 비 오는 날에 동생과 부추전에  맥주라도 한잔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꽃을 피우는 것-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올해 들어 비가 꽤 자주 온다.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내게 비 오는 날은 편두통도 빈번하게 찾아오고 마음도 꿀꿀하고 처지는 힘든 날이다. 물론 타닥타닥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 것은 아주 매력적인 일이지만 전반적으로 몸의 컨디션이 떨어지니 비가 오는 날은 울적하니 생각이 많아지는 심란한 날이다. 버스에서 내려 몇 걸음 걷다 보니 한, 두 방울 툭툭 비가 내린다. 가방 안의 우산을 꺼내 펼쳐 들고 걷는다.



 "이모 안녕하세요? " 중2학년 작은 조카가 배꼽 인사로 나를 반긴다. 동생은 빙그레 웃으며 나를 맞이한다. 조카를 꼭 안고 볼에 입맞춤한 뒤 마무리로 엉덩이를 토닥인다. 조카가 내 뺨에 답례로 뽀뽀를 해준다. 붙임성 좋은 둘째는 한참 사춘기에 속해 있어 감정의 기복이 크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 나의 손길을 거친 덕에 내게는 한없이 살가운 봄볕 같은 아이다.

 집에서 준비해 온 오늘의 메인 요리 재료를 냉장고 안에 넣고 외투를 벗고 동생과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 자매 아니랄까 봐 엊그제 보았는데도 할 말이 많다. 학부모답게 아이들 교육 문제가 주관심사이라 학부모 선배인 나에게 여러 가지 자문을 구하지만 나 역시 어리바리한 학부모였기에  동생이 원하는 신통한 해법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그저 잘 다독이고 믿어주라는-뻔한 말 같지만-오래되면서도 영원한 진리만을 말할 뿐이다.


 창밖엔 보슬비가 내린다. 앞치마를 찾아 두르고 본격적으로 동생과 조카들을 위한 음식을 하려고 밑재료를 준비한다. 부추를 다듬고 씻고 데칠 야채는 데치고 고기와 오징어도 다듬어 조리하기 쉽게 손질을 한다. 혼자 집안에서 우두커니 지내다 이렇게 가끔씩이라도 동생과 조카들을 만나고 그들을 위해 손수 음식을 해주는 것이 지금 내게는 유일한 생활의 활력소이자 기쁨이다.



 어제저녁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지며 심하게 심장이 요동치며 조여왔다. 요즘 그런 순간들이 빈번하게 찾아오니 당황스러웠다. 평온한 마음이 삐걱대며 흔들린다. 외로움은 덤으로 온다. 이런 고독의 순간, 고통의 순간이 내게 무의미한 과정이 아니라 나를 성숙하고 단단하게 할 것이라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나를 토닥인다.

  보고 싶은 얼굴, 아들이 떠오른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도로 제자리에 놓는다. 아들의 음성을 듣고 싶지만 지금의 울적한 내 마음을 들켜 아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나를 제어한다. 나의 아픔은 오로지 스스로의 몫. 피할 수 없는 과정이라면 이 무게에 짓눌려 주저앉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한다.



 큰 조카가 학교에서 돌아와 나를 보고 반색한다.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나를 보고 주방을 기웃거린다. 오징어 부추전이 달궈진 팬에서 빗소리를 내며 맛있게 구워진다. 하루 종일 수업하느라 고단하고 출출할 조카에게 갓 부친 뜨거운 전을 내민다. 맛있게 먹는 조카들을 보니 안 먹어도 배가 부른다.

 빗발이 점점 굵어진다. 어둑한 잿빛 하늘에서 시원스레 빗줄기가 쏟아진다. 후덥지근하니 장맛비 같다. 배부르게 먹은 아이들이 제각각 방으로 들어간다. 남은 부추전 반죽을 뜨거운 팬에 국자로 떠서 넣고 최대한 얇게 잘 편다. 고소한 냄새가 식욕을 자극한다. 동생이 일어나 냉장고 안에 둔 캔맥주를 꺼내며 내게 마시겠냐고 묻는다. 두 알코올 분해 효소 없는 여인들이 오늘은 웬일로 마음이 통했다. 술을 못 마시는 내겐 술 한잔은 연례행사인데 우연찮게 올해 들어 벌써 두, 세 차례 술자리를 가졌다. 그래 봤자 혼자서 마시는 맥주 한 캔이 전부이지만 그래도 저렴한 가격, 적은 양으로 센티한 날 제법 알딸딸하게, 기분을 낼 수 있으니-술이 약한 체질이 참 다행이다.


 앞치마를 벗고 식탁 앞에 앉는다. 습도가 높아 꿉꿉 하지만 기분만은 눅눅하지 않다. 비 오는 날 동생과 마주하고 술 한잔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는데 기대 이상 근사하다. 비록 술맛은 모르는 미각을 지녔지만 한참을 전을 부치다 마시는 맥주라 그런지 가슴속이 뻥 뚫리듯 시원하고 달다. "캬" 소리가 저절로 난다. 눈이 마주친 동생이 깔깔대며 웃는다.



 고즈넉한 저녁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나누고 양념으로 적당한 수다를 곁들이니 마음이 훈훈해지며 어제의 서늘한 기억조차도 따뜻해진다.  거울을 본다. 홍당무가 따로 없다. 키득키득 히죽히죽 웃다 혹시 조카들이 보고 놀릴까 비 오는 날 오후의 술자리를 여기서 마무리한다.

 고마운 마스크 덕에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불을 켠다. 까만 어둠이 금세 사라진다. 집안을 정리하고, 빨래를 개고, 꼬마 화분에 물을 주며 내게 묻는다. "너 지금 행복하니? " 잠시 침묵이 흐르는 이 순간 아들과 조카들과 동생의 웃는 모습이 떠오른다. 고개를 끄덕이며 "사랑한다." 고 낮게 속삭인다.



  다시 오늘의 태양이 떴다. 술 마신 다음날은 영락없이 두통으로 시달린다. 한잔 술도 예외는 없으니 남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다. 밝고 맑은 햇살이 마음에 남아 있는 습기를 말끔히 제거한다. 우리네 마음이 일기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흐리고 비 오는 날도 해가 쨍쨍한 날도 어느 것 하나 오래 지속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슬프고 절망의 날만 계속된다면 이 땅에 살아 있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생에서 비 오는 날이 있기에 오늘같이 태양이 눈부신 날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바싹한 토스트를 입에 구겨 넣고 명희 씨 카페로 거의 달리듯 걸어간다. 어제 카페의 창밖에 고혹적인 자태로 서 있던 다섯 송이 장미가 보고 싶다. 내 이름을 불러주며 환하게 미소 짓는 명희 씨도 벌써 그립다. 오늘  내 마음의 날씨는 맑음. 오, 해피데이! 써니 데이!

 

 


 


작가의 이전글 다시 나를 믿고 한걸음을 내딛으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