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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손 Aug 27. 2021

울적한 하루지만 그래도 나를 사랑해.

 며칠째 흐린 날씨에 마음이 울적하다. 서늘한 바람이 코끝에 맴돌고 어디선가 가을을 알리는 풀벌레 소리가 구슬프게 여겨지는 날이다. 하나의 계절이 가고 또 하나의 계절이 오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지만 가을을 타는 내게는 다가오는 계절이 반갑지만은 않다. 높고 푸른 가을 하늘과 곡식과 열매를 수확하는 결실의 계절이지만 나는 그 풍요로움 뒤의 쓸쓸한 고즈넉함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생명보다는 죽음을, 성장보다는 쇠락을 생각하며 나를 직면하는 시기는 매번 아프다. 첫 번째 우울증이 발병한 것도 늦은 가을날이었고 세 번째 우울증이 재발한 것도 낙엽 지던 가을이었다. 이렇게 여러 차례 학습된 고통은 가을이 미처 들어서기도 전부터 나를 두렵게 한다.


 새벽녘부터 시작된 두통이 아침이 돼도 가라앉지 않는다. 아픈 쪽의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고 호흡을 가다듬어봐도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또 미련을 떨었다. 편두통은 초기에 조짐이 보일 때 약을 먹어야 통증을 빨리 잡을 수 있는데, 미련하게 또 타이밍을 놓쳤다. 급하게 약을 찾아 물과 함께 삼켰다. 약을 먹고 한 시간쯤 지나니 견딜만해졌다. 진작 먹었으면 안 겪어도 될 통증이었는데... 몇 시간을 고생한 내가 참 미련하고 모자란 것 같아 씁쓸했다.



 "명희 씨,  잘 다녀왔어요?" 하며 카페 안으로 들어서니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긴다. 가족들과 휴가를 떠났던 그녀를 나흘 만에 만났다. 내가 매일 거르지 않고 카페로 출근하는 탓에 서로 하루만 안 보여도 서로를 걱정하는 우리는 동갑내기  친구이다.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카페 안이 손님으로 북적이는 바람에 서로의 소소한 일상을 나누지 못했지만 때로는 여러 말보다 따뜻한 미소로도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 정은  아닐까.

 

 카페 앞 정원을 바라보며 커피 한잔을 마시는 이 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하다. 오늘같이 울적한 날에도 지금 여기 이 순간만은 걱정도, 근심도 사라지고 오로지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한다. 머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공간. 어느덧 카페 '꿈꾸다'는 내게 꿈을 꾸는 곳. 그리고 내 영혼의 쉼터가 되는 둥지가 되었다.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불안으로 떨던 내가 비로소 이곳에서 마음이 고요해진다. 창밖을 한참을 내다보았다. 이상하게도 계절의 한복판보다는 계절의 끄트머리에서 우리의 감각은 더 생생해진다.

 

 어느새 비가 내린다. 창밖의 나뭇잎들이 비에 흠뻑 젖었다.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제자리에 있어 나를 위로해 주는 자연의 넉넉한 품에 감사함을 느낀다. 진한 커피 한 모금이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


 

 이마트로 늦은 오후 아르바이를 갔다. 휴가철에 비가 오는 날이라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이 없다. 매장을 정리하고 구겨진 옷을 다림질하며 내 마음의 구김도 함께 다림질했다.  청바지가 필요한 여자 손님이 바지를 입어본다. 내가 권해 준 디자인의 옷을 맵시 있게 소화하는 그녀를 보니 내가 덩달아 기분 좋다. 그녀의 옷태를 칭찬하니 그녀가 고맙다고 흐뭇하게 웃는다. 다정한 말 몇 마디 오고 갈 뿐인데 사람 사는 정이 느껴진다. 

 다정한 모자가 매장으로 들어선다. 가볍게 입을 셔츠와 슬랙스를 찾는다. 친구같이 허물없는 그들의 말투와 모습에 나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손님들이 고른 옷을 정성스레 포장하고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배웅한다. 

 하루 종일 비는 내리고 이유 없이 슬픔이 목까지 차오른 날이지만 그래도 내게 주어진 일이 있어  잠시나마 시름을 잊을 수 있어 다행이다.

 


 

 퇴근길 편의점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왠지 술 한잔이 생각나는 날이다. 냉장고에서 젤 먼저 손에 잡히는 300ml 맥주 한 캔을 집어 계산을 하고 나왔다. 우산 위로 빗방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불 꺼진 현관문을 열고 벽을 더듬어 전등의 스위치를 켠다. 빛이 어둠을 이내 삼키고 나를 반긴다.

 

 유리잔에 맥주를 가득 채우고 빗소리를 안주 삼아 천천히 들이킨다.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거울 속에  홍조를 띤 여인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적당히 취기가 느껴지며 가슴이 두근댄다.

 마음을 알아줄 이가 아무도 없다고 느껴지는 날.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가 서글퍼 술이라도 친구가 되고 싶은 날. 오늘이 내게 그런 날이다. 마시지 않아도, 취하지 않아도 심하게 비틀거리는 유난히 쓸쓸한 날. 나의 비틀거리는 삶을 술 한잔이 친구가 되어 잡아준다.

 흔들리며 가는 것이 인생이지만 오늘은 나를 흔드는 작은 바람에도 불에 덴 듯 아프고 쓰리다. 팔을 뻗어 나의 어깨를 끌어당기며 "사랑해"하고 속삭인다. 뺨을 타고 또르르 눈물 한 방울 떨어진다.



https://youtu.be/NpTpEsE9G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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