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자타가 인정하는 어느 정도는 교양을 갖춘 아줌마다.ㅎ
그리고 처음부터 '지랄하네~~'를 속으로 되뇐 것은 절대 아니다.
어찌어찌 살다 보니, 흉보면서 닮는다 했는데 어느새 우리네 할머니가, 엄마가, 보통의 아줌마들이 속상하거나 억울하고 짜증 날 때 아님 그도 저도 아닌 애매한 상황에서 리듬을 맞추듯 뱉어내는 그 말을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다.
예전에 친척 결혼식장서 만난 분당 외숙모가(외숙모 어린 시절, 여학생이 대학 나오는 것은 흔치 않은 시절이었고 명문 여대를 나오셨다.) 피로연에서 나와 사촌들과 식사할 때 무슨 말끝엔가 "지랄하네"하시길래 삼십 대 후반인 나는 깜짝 놀랐는데-내심 저렇게 교양 있는 분도 나이 드시면 보통의 아줌마들과 비슷해지시나 해서 좀 충격이었다.
나름 언어는 그 사람의 품격이라고 믿었던 젊은 시절. 지금 어찌 생각하면 좀 재수 없지만 어휘 선택도 어렵게 미사여구도 과하게 표현했던 것 같다.
그랬던 내가 아들 중학교 입학 무렵부터 슬슬 표현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이 놈의 자식이, 이 새끼가~~
그놈의 공부가 뭔지-그 당시는 아들의 미래는 학업의 성과에 따라 달라진다고 믿었다-교양은 저만치 달아나고 원색적인 분노만 남았다.
사춘기와 맞물린 아들은-지금 생각하면 그래도 순한 양 같은 아들이었는데-내 기대만큼 학업에 관심이 없었고 성적도 겨우 중간 언저리에 걸쳐있었다.
그때 처음 익힌 '지랄하네'는 아주 가끔 아들 때문에 속상한 일이 있을 때 친한 지인에게 아들 흉을 보며 마지막으로 쏟아내는 한숨이자 분노였다.
세상일은 뜻대로 안 된다는 것, 자식일도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을 애가 고등학교 다니던 때 문득 깨닫고 다시 교양 있는 엄마로 돌아왔다.(아들을 위해 학부모에서 엄마로 돌아가고 싶은 나는 '어머니학교'라는 치유 프로그램을 수료했다.)
이혼 후 아들은 바로 입대했고, 전업주부였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많지 않았다. 더욱이 나는 틈틈이 우울증과 싸워대느라 잦은 파업을 일삼았다.
일은 나한테는 자기 계발의 의미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병이 심했던 2~3년을 제외하고 동생네서 조카들 돌보고, 마트, 아울렛서 일하다 최근엔 백화점 여성의류 판매일을 하고 있다.
마트, 아웃렛 다닐 때까지는 몰랐는데, 백화점에서 일하는 것이 근무조건이 좋은 반면 자질구레한 일처리부터 힘을 요하는 일 그리고 백화점의 특성상 고객 컴플레인이 많다는 것이다. 거기다 직속상관인 매니저와는 거의 상명하복의 관계. 헉~
처음엔 좋은 근무환경에서 일할수 있고 그 좋아하는 옷을 원 없이 볼 수 있어 신났었는데 얼마 못가 코가 쭉 빠졌다.
일을 시작하고 며칠쯤 지나서 우리 매장으로 한 고객이 소리를 치면서 들어섰다. 카드 취소가 안되었다고 카드 명세표를 내 얼굴 앞에 들이밀고 삿대질이다.
나 없을 때의 일인 것 같은데, 매니저님 금방 오신다고 말씀드리고 진정시켜도 소용이 없다. 그러더니 의자 옆 테이블에 있는 내 안경케이스를 내가 서 있는 방향으로 던졌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내가 아는 온갖 종류의 욕이 다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지랄하네~지랄한다~'를 끝으로 매니저가 와 상황이 종료되었다.
사는 것이 만만치 않다. 그 사건 이후로도 몇 번 눈물을 삼키며 '지랄하네'를 되뇐 적은 부지기수다.
그래도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므로 어쩌다 무식한 갑질 하는 고객도 나보고 일머리 없다고 수시로 면박 주는 매니저도 같이 일하는 동료들의 위로 덕에 견딜 수 있었다.
출근길 버스에서 발을 밟혔다. 쓱 그냥 지나친다.
지하철 승강장 앞 줄 서 있는데 새치기당한다.
나 보다 어려 보이는 고객이 툭툭 반말을 한다.
집 없는 난 어쩌라고 집 값은 계속 오른다.
매달 허덕이는데 신상을 저질렀을 때~
아들놈이 내게 연애나 하라 약 올릴 때~
사는 게 팍팍 해 눈물 나올 때~
또 울며 청승 떠는 내가 싫어 나에게
'지랄하네, 지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