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쁜손 Oct 15. 2021

가을 앓이.

눈부신 푸른 날의 단상.


 모처럼 눈이 부시게 빛나는 햇살과 파란 물빛 하늘이 아름다운 날이다. 일주일 넘게 흐린 날씨에 마음도 울적하고 눅눅했는데, 아침 산책길에 투명한 가을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니 마음이 금세 뽀송뽀송해지는 느낌이다.

 며칠을 끙끙 앓아누웠었다. 환절기여서 그런 것인지 날씨 탓인지 마음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매년 이 맘 때면 연례행사처럼 가을 앓이를 심하게 하는 내게 한 주는 힘든 시기였다. 일기에 따라 감정 기복이 심한 나에게 마치 장마 때 같은 우중충한 날들은-한없이 마음을 가라앉게 했다.

 

 식욕도, 책을 읽고 글을 쓸 마음도 없이 하루 종일 유튜브의 음악을 틀어 놓고 하루 종일 웅크리고 집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가끔 창밖으로 집 앞의-갈색으로 물든 동산의-풍경을 바라보는 일이 전부였던 마음의 우기였다. 순환하는 자연의 자연스러운 이치를 알면서도 스러져가는 무성한 나뭇잎들을 보며 소멸한다는 것에 대해,  삶의 무상함에 대해 떠올리며, 인생이 찰나와 같다고 허무해했다. 그 허무함 뒤로 나는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는 물음이 몰려오곤 했다. 내가 가는 길이 과연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하는 두려움이 우울함과 뒤섞여 가을이란 계절은 나를 힘들게 했다.


  

 조카의 중간고사 기간이라 조카의 점심을 챙기러 버스를 탔다. 어제 조카가 열심히 준비한 수학 과목을 망쳐 의기소침해 있다는 동생의 전화를 받았다. 열심히 준비한 조카의 마음을 알기에 맛있는 음식으로 위로를 해주고 싶었다. 버스에서 내려 가까운 마트에 들렀다.

 건강하고 담백한 음식을 좋아하는 큰 조카를 위해 메뉴를 캘리포니아 롤로 정하고 잘 익은 아보카도를 골랐다. 간식으로 그릭 요구르트 한통과 울적한 기분을 달래줄 초콜릿을 고르고 시계를 보니 11시가 되었다. 서둘러 마트에서 나와 동생네로 향한다.

 시험을 끝내고 일찍 집으로 돌아온 조카가 나를 맞이한다. 시험기간이지만 혹시라도 조카의 마음이 불편할까 봐 시험에 대한 아는 척도, 언급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대학을 향해 달려가는 교육 현실 속에서 경주마처럼 성적을 향해 달려 나가는 아이들이 안쓰럽지만 행여 잔소리가 될까 아무 말하지 않았다.


 "유주야 너 배고프니? 오늘 네가 좋아하는 캘리포니아 롤 해줄게. 몇 시쯤 먹고 싶어? " 하고 물으니 조카가 배시시 웃으며 "이모 배고파. 빨리 해줘~" 하며 성화를 부린다. 그 허물없는 사랑의 말투에 내가 소리 내어 웃으며 조카의 등을 토닥인다.


 

 주부 9단이 되고도 남을 나이이지만 나는 영 칼질이 무섭고 서툴다. 음식의 맛을 내는 것은 평균 이상인데 언제나 기본인 칼질이 서툴러 음식을 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다. 하지만 오늘은 사랑하는 조카가 배가 고프다니 젖 먹던 힘을 다해 몸과 손을 부지런히 움직인다. 모르긴 몰라도 꿀꿀하고 기운 없을 때는 맛있는 음식만 한 치료제가 없다. 망친 시험으로 풀 죽은 고1의 조카를 위해 우울함 따위는 잠시 내던지고 요리에 몰두하니 한 시간 만에 원하는 맛과 비주얼의 캘리포니아 롤이 완성됐다.

 

 아들은 멀리 떨어져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해서 먹이는 기쁨은 잘 누리지 못하지만 다행히 사랑하는 조카와 동생 가족이 가까이 있어-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요리하는 주부와 엄마의 기쁨을 느낄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잠시나마 소박한 삶의 기쁨을 잊었던 내가 부끄러웠다. 허무는 작은 것에 대한 감사를 잊었을 때 찾아오는 무력감이었다. 마음먹기에 따라 작은 일상도 기적이 된다는 것을, 그런 기적들이 모여 나를 이루고 내 삶을 만들어 간다는 평범한 진리가 새삼 가슴에 크게 와닿는다.

 



 "이모 바이~~ "하는 조카를 뒤로 한채 서둘러 동생네를 나온다. 시간이 벌써 3시가 조금 넘었다. 오늘 오후에 이마트 캐주얼 코너에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나가는 날이다. 빠른 걸음으로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면서-심호흡을 크게 하고-높고 푸른 하늘을 다시 눈에 담는다.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투명한 파란 하늘빛이 가슴을 뛰게 한다. 하얀 뭉게구름이 설레게 한다. 자연은 나의 위로이자 참 스승임을 다시금 깨달으며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신께 감사를 드린다.

 

 차창 밖으로 거리의 풍경을 바라본다. 가로수들이 어느새 울긋불긋 가을 옷으로 갈아입었다. 노란 은행잎들이 눈이 부신 오후다. 오늘은 맑지만 내일도 모레도 다시 흐리고 비가 오는 날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인생이 늘 그러하듯이 어쩌면 오늘 같이 빛나는 날은 가끔 선물처럼 주어지는 행운일지 모른다.

 하지만 난 오늘 이 맑고 파란 하늘을 보고 또 보며 내 머리에, 눈에 각인시킨다. 그리고 아무리 긴 우기 속에도 절망하거나 체념하지 않고 오늘의 기억을 꺼내보며 희망을 꿈꿀 것이다. 매일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내가 살아있는 동안 그것은 계속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가치를 창조하는 긍정적 고독 속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