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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손 Jan 05. 2022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무는 삶.


 새해를 맞이하고 삼일 째, 동생과 함께 마주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갑작스레 닥칠 수 있는 죽음으로 주제가 흘러갔다. 오십 초반인 동생과 오십 대 중반인 내게 어쩌면 조금 이를 수도 있는 이야기이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은 분명 우리가 지나온 시간보다 적을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죽음에 관한 대화나 생각들을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것보다는 부정적인 단어로 터부시 해왔다. 하지만 어찌 보면 삶은 결국은 죽음이란 종착역으로 달려가는 것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몇 달 전 집에 온 아들과 대화를 나누다 조심스레 꺼낸 연명치료 거부에 대한 말은 생각지도 못 한 아들의 부정적인 반응에 이야기를 다 끝마치지 못하고 말았다. 아들의 생각에는 아직 젊은 엄마가 스스로의 죽음에 대해 준비하고 계획하는 모습이 낯설고 당황스러울 수 있겠다 싶어 하던 이야기를 중단했었다. 그리고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오늘 동생과 대화 중에 새해 설계를 하다가 이야기가 노후준비로 이어지다 각자 죽음에 대한 소견을 주고받게 되었다.



 사실 코로나 백신 접종 전에 혹시나 모를 부작용을 생각해 유서라고 하기에는 너무 간략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아들과 동생에게 하는 당부의 메모를 적어 놓은 적이 있다. 다행히 아직 건강해 유서가 내 손을 떠나지 않았지만-그것은 혹시나 모를 사고에 남은 가족들을 편하게 해주고 싶은 나만의 작은 배려였다.

 어쩌다 보니 새해 벽두부터 삶에 대한 계획이 공교롭게도 잘 죽는 법에 대한 이야기로 동생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결혼을 친구들보다 이른 시기에 한 나는 아들이 올해 서른 하나인데 반해 동생은 결혼을 늦게 한 탓에 아이들이 한참 어리니  죽는 법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꽤나 심란한 기색이 역력하다.

 

 "난 심폐소생술부터 거부하고 싶어." 나의 말에 그녀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최대한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것이 내 평소의 바람이다. 그렇다고 내가 남들보다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누구보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사람의 명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믿고 살았다. 사십 대 초반 내게 주어진 암을 겪으며 앞으로의 삶은 덤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어느새 세월이 십몇 년이 흘렀다.



 수다 끝에 나온 죽음에 대한 각자의 계획은 전혀 무겁지 않았다. 연명치료에 대한 생각과 장례식 없는 간단한 절차는 서로 이견(異見) 없이 일치했다. 물론 남은 가족들의 의견도 염두에 둬야겠지만 나의 경우는 형제 없이 혼자 엄마를 보내야 하는 아들의 현실적인 짐을 더는데 도움이 되고 싶었다. 삶의 탄생과 시작은 내 뜻이 아니었지만 마무리만큼은 내 의지로 정리하고 싶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큰 조카가 주방에서 분주하다. 방학을 맞아 여유가 생긴 탓에 오늘 점심은 볶음밥으로 나와 가족들을 대접할 모양이다. 어느새 열여덟이 된 큰 조카의 분주한 뒷모습을 보며 흰머리가 한 올, 두 올 내리기 시작한 나의 모습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여겨졌다. 새싹으로 돋아나 꽃을 피우고 낙엽처럼 지는 삶의 과정. 나의 삶이 비록 쇠하더라도 아이들이 그리고 아이들의 아이들이 순환하며 우주를, 역사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경이롭게 느껴졌다.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저들의 유전자 속에 기억으로, 흔적으로 남는 것이었다.

 



 기름에 달달 볶는 파 향기가 식욕을 돋운다. 제법 아가씨 티가 나는 조카가 대파로 향을 낸 기름에 스팸과 캔에 있는 옥수수를 넣고 볶음밥을 뚝딱해서 한 그릇 담아왔다. 햄이 들어 자칫 느끼할 수 있는 볶음밥을 대파의 맛이 개운하게 잡아줬다. 다시 동생과 조카들과 마주하는 시간, 삶의 중심부로 걸어 들어왔다.


 집으로 어둑한 저녁 기운을 가르며 돌아왔다. 얼마 전 작성한 나의 유서를 들여다보다 미흡한 부분을 수정했다. 어쩌면 이제는-항상 새해를 맞이하며 하는 계획들 중 죽음을 앞둔 나의 각오와 당부를 제일 먼저 손을 보아야 하는-때가  것 같다. 남은 삶을 귀하게 여기기 위해, 조금 더 겸손함을 배우기 위해 언제고 내게 닥칠 죽음을 준비하는 삶. 이것이 나와 나의 삶을 더 풍요롭게 준비하기 위해 선택한 삶의 방식이다.

 이 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뜨겁게 사랑하며,  매일매일을 죽는 연습을 할 것을 조용히 다짐한다. 메멘토 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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