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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손 Jan 13. 2022

망중한에 갖는 단상.


 집에서 버스로 10분 거리에 막국수 맛집이 있다. 담백하고 투박한 맛이-먹을 때는 맛있는지 잘 모르지만 묘하게 중독성이 있어 주기적으로 가끔 생각이 난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겨울이지만 시원한 동치미 육수에 말아먹는 막국수가 생각나 수고스럽지만 버스를 타고 식당에 도착했다. 언제나 그렇듯 혼밥족인 나는 식당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따뜻한 메밀 삶은 육수를 입으로 호호 불며 마시며 추위를 녹인다.


 막국수 하면 늘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새댁 때의 일이다. 춘천에 사시는 시할아버지 댁에 시부모님과 지금은 헤어진 전남편과 함께 인사를 드리러 갔었다. 시할아버지 댁이 있는 집 근처에 오래된 막국수 집이 있었다. 오래된 맛집이라-인근뿐 아니라 멀리 타 지역에 사는 손님들까지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라- 춘천에 방문할 때는 온 가족이 들르곤 했는데 나는 그 주기적인 방문이 달갑지 않았다.

 막국수는 결혼해서 그때 처음 맛보는 음식이었는데 조금은 밋밋한 맛에 내 입에 맞지 않을뿐더러 어마어마한 양에 먹는 양이 적은 내게는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국수 때문에 어른들의 눈치를 보며 꾸역꾸역 삼켜야만 했다. 혹시라도 갓 시집온 며느리가 입성이 까다롭다고 흉보시지는 않을까. 음식을 남기는 것을 싫어하시는 어른들의 눈밖에 날까. 소심한 며느리 노릇을 하던 때였으니 막국수 먹는 날은 고역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며느리 이야기라 웃음이 나오지만 불행하게도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 말이 내게는 해당이 안 됐다.



 소담스레 돌돌 말은 국수에 살얼음이 동동 떠있는 동치미 육수와 들깨가루와 마른 김을 고명으로 얹은 막국수를 한 젓가락 베어 문다. 툭툭 끊기는 막국수의 질감에 바로 순도 높은 메밀국수임을 혀끝에서 느낄 수 있었다. 짜릿하게 톡 쏘는 동치미 육수에 구수한 메밀의 거친 맛이 일부러 버스를 타고 온 보람을 느끼게 한다.


 지금은 단맛. 흔히들 단짠이라고 달고 짭조름한 맛을 즐겨 먹지 않지만 젊어서 한때는 몸에 좋은 음식들보다는 혀에 달콤한 음식들에 몰입한 적이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었던 시절이 있었던 것처럼 음식 본연의 맛, 천연의 재료보다는 감칠맛을 내는 양념 맛으로 음식을 즐기던 시절이 있었다. 세월 따라 내가 변하듯 내 입맛도 시간 따라 익어간다.


 호랑이로 작은 어머니들에게 불리던 시할아버지는 그래도 손주며느리에게는 따뜻하신 분이었다. 어른들 눈치 보며 먹어도 먹어도 국수가 불어 줄지 않는 막국수를 먹는 나를 보시며 "새 아가가 양이 적구나. 체한다. 천천히 먹어라." 하고 말씀하시며 빙그레 웃으시던 생전 모습이 내 앞에 놓인 막국수를 보며 떠오른다. 결혼 후 얼마 뒤 돌아가신 어른이었지만 그래도 내게 제일 살갑게 대해주신 어른. 막국수를 맛있게 먹는 법을 일러주시던 그분이, 이십 대의 내가 불현듯 보고 싶은 날이다.



  "이모 제가 쿠키 만들었어요." 하고 유준이가 동생집에 들어서는 내게 자랑스레 말하며 식탁 앞으로 나를 이끈다. 접시 위에 하트 모양, 별 모양 쿠키가 방금 오븐에서 나온 듯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시간이 또 지나면 이날의 기억도 추억으로 떠오르겠지. 내가 지금을 사는 이 순간도 그리울 날도 있겠지... '

 조카를 향해 팔을 벌리니 내 품으로 유준이가 와서 안긴다. 따뜻한 체온의 교감이 살아있음을 실감 나게 한다. 행복하게 한다.

 올 해의 시작은 아무런 계획과 다짐 없이 시작했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하루하루를 행복한 기억들을 만들고 싶다는-오늘을 소중히 여기는 삶을 살고 싶다는 간절함이다. 때로는 내 뜻과 다르게 슬픔과 좌절의 소용돌이가 내 삶을 엄습해 올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내 삶의 일부로 이제는 부인하지 않는다.


 

 어느새 서른 하나가 된 아들의 나이가 믿기지 않고 자식이 나이 들어가는 것이 내가 해가 갈수록 더 늙는 것보다 더 슬프게 여겨지는 때가 되었다. 이렇게 나의 세대는 저물어가겠지만 이것이 자연의 섭리이고 이치임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만감이 교차하는 하루다.

 진한 커피 향과 오후의 햇살이 길게 들어선 창가 앞 테이블에서 조카가 만든 쿠키를 놓고 오늘의 고요를 감사한 마음으로 즐긴다. 막 피어나는 새싹 같은 조카들을 바라보며 부디 아름다운 꽃으로 피기를 소원하며-새해엔 더도 덜도 말고 오늘 같은 평화가 내게 머물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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