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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손 Jan 21. 2022

이십 대, 그 찬란한 여정 속으로 걸어 들어가다.


 옷장을 열어-가지고 있는 옷들을 하나, 둘 꺼내 입어본다. 지금 입고 다니는 다운 점퍼와 몇 년 전 구입해 두고-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주야장천 구스 패딩만 입고 겨울을 난다.-옷장에 고이 모셔 둔 코트를 꺼내 걸치고 거울 앞에 선다. 아무래도 코트가 두꺼운 패딩보다는 옷태가 난다. 우선 겉옷을 정하고 코트 안에 입을 이너웨어로 블랙 풀오버 니트와 블랙 데님 팬츠를 골라 놓았다. 수수하면서 센스 있는 옷차림, 꾸민 듯 안 꾸민 것 같은 옷차림을 완성하기 위해 오랜만에 분주히 옷장을 뒤적인다. 옷을 못 입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30년 만에 만나는, 나의 풋풋한 과거의 모습만을 기억하고 있을 친구를 만나는 일은 설레면서도 긴장되는 일이다. 되도록이면 곱게 나이 먹었구나 하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편한 운동화만 싣고 다니는 탓에 변변한 구두가 없어 고민하던 중 신발장 귀퉁이에 버리기 아까워 모셔 둔 앵클부츠가 눈에 띈다. 패션의 완성은 가방과 신발이라는데... 유행이 지난 가방 몇 개를 놓고 고심하다 좀 캐주얼한 블랙 클러치백을 선택했다. 차림은 이만하면 구질 해 보이지 않을 것 같다. 내 사정을 친구는 다른 친구들을 통해 대충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알량한 자존심이 후줄근한 모습으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아직 철이 덜 들었나 싶다.


 화장대 위의 화장품이 단출하다. 스킨, 로션, 크림만 있고 색조화장품은 달랑 립스틱만 있다. 맨 얼굴로 가기엔 예의가 아니지만 화장품을 새로 사기엔 오버하는 것 같아 연한 장밋빛 립스틱 하나를 골라 놓았다. 차림새는 미리 정해 놓았는데 거울 속에 비친 머리 스타일이 더부룩한 단발이다. 내일 약속 전에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다듬으면 그런대로  초라하지는 않을 것 같다.



 주는 나의 중학교 동창이다. 그녀도 나도 지금에 비하면 좀 이른 나이, 스물다섯에 몇 달 차이로 결혼을 했다. 나보다 앞서 간 그녀의 결혼식 부캐를 내가 받고 몇 달 뒤 결혼을 했다. 결혼 후 바로 나는 공부하는 남편을 따라 프랑스로 떠났고 그 후 소식이 끊겼는데... 친구 영이를 통해 이번에 연락이 이루어졌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 떨리는 이십 대, 나를 기억하는 옛 친구를 만난다는 사실만으로도 잠시나마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아  가슴이 뛰었다.

 알고 보니 나와는 가까운 2,30분 거리에 그녀가 운영하는 퀼트 공방이 있다고 한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니 손재주가 많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은 굴곡진 인생의 풍파 속에 젊은 시절 욱하던 정의감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이 사라지고 당당했던 자신감도 소심함으로 변질되어 동생의 표현대로 기가 많이 죽었는데...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나의 이십 대 역시 거칠 것이 없는 시절이었다. 나의 젊은 시절을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그녀를 만나다는 것은 왠지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가는 것 같아 가슴이 두근댔다. 첫사랑의 나의 모습을 만나는 듯 기분 좋은 행복감과 기대감이 나를 가득 채운다.



 이런저런 옛 생각을 하다 잠을 설쳤다. 희미해진 기억 사이에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의  편린들을   좇아 헤매다 잠에서 깼다. 거실까지 길게 들어온 아침 햇살이 눈이 부시다. 아침으로 간단히 토스트 한쪽과 사과를 챙겨 먹고 어제 미리 입어 보았던 옷으로 갈아 입고 립스틱을 곱게 발랐다. 머리를 자르기 전 명희 씨 카페에 들러 모닝커피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창밖을 본다. 며칠 째 한파에 폭설로 추위의 절정을 이뤘는데 오늘은 포근한 겨울이다. 겨울 햇살이 눈이 부시다. 어느새 봄의 기운이 다가온 듯 볕을 즐기기에, 벗을 만나기에 좋은 날이다.

 지하철을 타기 전 명일당에 들러 에그 타르트를 샀다. 진하고 깊은 맛이 일품인 타르트 맛을 친구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짧아진 머리가 발걸음을 한결 가볍고 경쾌하게 한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은 내가 잠시나마 빛나는 이십 대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이다. 오늘의 고민과 아픔, 걱정은 지금 내 몫이 아니다.



 "영주야, 나야 네 부캐 받았던 은경이... " 하고 그녀의 손을 맞잡는다. 꽉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짧고도 무심하게 흘러간 30년이 넘은 시간 앞에 한동안 두 여인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서로의 주름진 얼굴과 희끗한 머리를 바라보며 그 속에서 기억을 더듬어 옛 모습을 떠올려간다. 뒤에 합류한 지영이까지 셋이 마주하니 재잘거리던 그때 그 시절로 추억의 문을 연다.

 나의 옛 모습을 기억하는 흉허물이 없는 친구들 앞에선 우리가 함께 하지 못한 몇십 년이란 세월도 장애가 되지 않았다. 세월의 흐름에 달라진 외모도, 살아온 배경도 우리를 어색하고 거리를 두게 하진 않았다. 익숙한 옷을 입은듯한 편안함이 혹시나 했던 긴장감을 무장해제시켰다.

 까르르 거리며 소녀들이 웃는다. 작년에 며느리까지 본 영주이지만 그녀 모습 위로 이십 대의 그녀 모습이 자꾸 오버랩된다. 친구들의 눈동자 안에 나의 젊은 날의 초상이 머물러있다. 그리운 과거의 내 모습과 마주 한다.



 땅거미 길게 드리운 길을 걸어 집으로 향한다. 떠들썩한 만남과 아쉬운 포옹으로 마무리 한 이별. 자주 보자고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하던 소녀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오늘 하루는 잊고 지냈던 젊은 날의 빛나던 청춘으로 회귀했던 날이다. 아무것도 없어도 존재만으로도 빛나던 시절. 그 당당함을 잊고 살았는데 친구들이 나를 시간 여행으로 초대해 주었다. 아름다운 재기로 반짝이던 시절이 다시 걸어 앞으로 가라고, 넌 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밤이다.

 두 팔로 나를 꼭 안는다. 사랑한다고 내게 말하며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는 내가 다시 부활하는 날-새로운 날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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