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쁜손 Dec 02. 2020

겨울이 오는 길목에 서서

 바람이 분다. 차가운 바람에 잎새를 떨군 나목들이 울고 있다. 해마다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시기는 매번 참 아프고 견디기 힘들다.

 겨울은 빛에서 어둠으로, 생명에서 소멸로, 희망에서 절망으로 가는 길 같다고 여겨진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철이 들고 내가 한참 생의 한가운데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겨울은 그런 나를 비웃듯 얼음 같은 냉소를 띄고 다가오곤 했다.




 처음 신경정신과를  찾은 것은 이혼한 그해 가을이었다. 아들이 입대한  몇 달 지나지 않은 가을과 겨울이 교차하는 때였다.

 오랜 시간을 남편과 남처럼 지냈지만... 법원에서의 절차는 채 5분을 걸리지 않을 만큼 간단했다. 그렇게 우리의 22년간의 결혼생활은 마감됐다. 

 홀가분함? 시원함은 잠시였다. 그렇다고 사랑이, 미련이 남은 건 아니었다. 우리는 애증조차 오래전에 증발해 버렸고 무관심만 남은 상태였다.

 참고 참아 굳은살이 박인 가슴으로 허무함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삶은 종종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난다. 나는 미련하게 잡고 있던 결혼생활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더 이상의 불행은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자유함 뒤로 패잔병의 서글픔과 아들에 대한 미안함이 몰려왔고  스스로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이혼 후 몇 달 지나지 않아 나는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았고 혼자서 집 밖을 나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편두통이 시작된 지 일주일이 넘었다. 아무 약도 소용이 없다. 잠을 잘 수도 제대로 먹을 수도 없다. 직장에서 조퇴한 동생이 응급실을 통해 정신과로 나를 데려갔다.

 내 오랜 기억으로도 바람이 몹시 불었던 늦은 가을날이었다.

  어떻게 몇 장이나 되는 긴 문진표를 작성했는지 모르겠다. 불안한 눈동자는 몹시 흔들렸고 동생의 팔을 힘주어 잡고 병실로 들어갔다.


  그게 시작이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스산하고 생경했다.

 병원을 오가는 동안 양날의 검처럼 두 가지 마음이 공존했다.- 살고 싶은 마음과 죽고 싶은 마음. 하지만 내게는 나를 사랑하는 노모가 있었고,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다. 그 두 사람은 저울의 추의 균형을  삶으로 돌려놨다.



 얼마 전 유쾌한 미경 씨가 전화를 했다. 그녀는 추위 때문에 겨울이 싫다고 한다. 산책길에 희한한 걸 봤다고 목소리가 들떠있다.

 "개나리가 착각했나 봐요. 봄인 줄 알고 양지바른 담장 위로 개나리들이 활짝 폈어요! 호호호 "

나도 개념 없는 개나리로 덩달아 같이 웃었다.

 겨울- 생명은 스러져가고 유에서 무로, 소멸한다 생각했는데...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어도 생명은 질기게 뿌리를 내리고 몇 달 뒤 새 계절에 우리를 맞이할 것이다.

 혹독한 시련은 더욱 아름답고 강인한 꽃과 열매를 맺게 한다.



 나는 지금 생애의 어느 지점을 통과하고 있을까? 나도곧 겨울로 갈 것이고 나의 겨울 길목도 그러하겠지... 더 단단하고 고운 꽃을 피울 것으로 믿는다. 추위가 혹독할수록, 폭설이 많이 내릴수록 더 단단한 열매가 맺힐 것이다.



 부끄럽지만 학교 다닐 때 한 번도 개근상을 받아본 적이 없다 약골이기도 하고 어쩌다 가기 싫은 날 꾀병을 부려도 엄마는 모른 체 넘어가 주셨다.

 8년째 나는 정신과에 정기적으로 진료를 받는다. 여러 번 위험한 순간이 있다 보니 출석이 길어졌다.

 병원 가는 날은 귀찮다. 이젠 어떤 때는 선생님이 너무 걱정하실까 봐 대충 너스레를 떨고 반 농담조로 상담을 끝마친다.

 이젠 오래된 친구 같기도 하다.

약을 줄여 달랬더니 이미 최소량이라고 거절하신다.

'나 괜찮은데...'

친구들은 내가 약을 먹는 이유를 모른다고 할 만큼 1,2년 새 좋아졌다.

3달 후에 내원하기로 한다.



 바람이 분다. 갑자기 닥친 초겨울 추위에 사람들이 종종걸음 친다. 생명에서 소멸, 소멸에서 다시 생명으로 자연은 끝없이 순환된다. 

 더 이상 꿈꿀 수 없을 때,  희망의 한 자락마저도 찾을 수 없을 때 우리에게 우울증은 찾아온다.

 

 나는 믿어보기로 했다. 차디찬 겨울의 시작점에서 앞으로 다가올 만개한 꽃들의 향연을 꿈꾸며 봄은 올 것이라고...





 

 


 


 


 

 

 

 


 

 

 


 


 

 

 

 

 .

 

작가의 이전글 빨간 립스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