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다

숨은 그림 찾기

by 예쁜손


15년 전 처음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은 몇 달의 테스트를 거쳐-일곱 알이 조금 넘는 삼키기에도 벅찬 개수를-나는 무려 십 년을 복용했다. 십 년이 넘어 차츰 약의 용량을 줄여-불안, 공황 증상은 사라지고-우울증 약만 두 알만 복용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감사하다. 평안한 마음과 감사한-소소한 일상을 묵상할 수 있게 된 변화는 내게는 거의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불안하고 부정적이고 걱정, 두려움이 많은 내가 그런 나의 오래된 습관을 알아차리고 미래에 대해 과도한 두려움으로 오늘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지인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할 수 있게 된 몇 년은 주님의 은혜가 만든 기적이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평안은 삶에 대한 기대까지 생기게 되었으니 축복이었다. 물론 크고 작은 삶의 고난이란 파도가 밀려오는 당연한 일상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포기하지 않게 만든 건 내 자아가 강해지고 단련되었다고 보기보다는 믿음이 조금은 자랐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낮잠을 거의 자지 않는 내가 요즘은 누워 있는 날들이 많아졌다. 한없이 침잠하는 나를 수면 위로 떠올리게 만들던 따사로운 햇살도 간절한 눈물의 기도도 언제부턴가 힘을 잃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에 나를 혐오하는 슬픈 자아가 거울 안에 초라하게 서있다. 단 기간에 줄인 약 때문일까 아니면 영원히 평행선일 것 같은 남편 때문일까 여러 문제를 되짚어 보지만 나의 이 나른하고 소모적인-스스로를 탓하는-한동안 잊고 지낸 고질적인 습관은 나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사람은 여러 가지 페르소나를 지니고 있다. 곧 퇴근할 남편을 위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안한 얼굴로 저녁을 준비한다. 그가 오면 난 또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붙이고 같이 두어 시간 앉아 티브이를 시청하다 잠자리에 들 것이다. 그리고 다시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겁이 많고 소심한 자아를 질겅질겅 씹으며 자기 학대를 하고 슬픔에 젖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친한 권사님이 제주 여행을 같이 가자고 하신다. 전형적인 은둔형 집순이인 내가 한치의 망설임 없이 승낙을 하고 떠날 날짜를 손꼽아 기다린다. 예의상 허락을 구하는 내게 남편이 선뜻 허락을 하고 경비를 주었다. 내 소용돌이치는 마음을 전혀 알리 없는 그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이 든다.


일주일 예정으로 먼저 떠나신 권사님을 나는 2박 3일 여정으로 목요일 제주공항에서 만나기 위해 공항 탑승장으로 향했다. 날씨가 포근하니 햇살이 부드럽다. 내 거칠고 차가운 마음을 달래주려는 절대자의 손길을 느끼며 아주 오랜만에 진심을 담아 감사드렸다.

1월인데, 방학 중이어서 그런지 가족단위의 여행객들로 기내가 가득 찼다. 거의 뒷자리에 자리를 잡고 눈을 감고 심호흡하는 중 옆 자리에 누군가 앉는 기척이 느껴진다. 본능적으로 눈을 뜨고 옆모습을 힐긋 바라보는데, 낯익은 모습의 배우가 떠오른다.



잠시 망설였다. 평소 호감 가는 연기자였지만 나의 반가운 인사가 부담스러울 수 있어 머뭇거리는데... 눈빛이 잠시 마주치니 가볍게 동시에 목례를 했다. 소심한 내향인인 내가 조심스레 소리를 내어 반가운 마음과 새해 덕담을 하니 소탈한 대배우가 다정하게 인사를 하고 나의 노트에 내 이름을 적고 행복하시라고 사인을 해준다.

가슴이 뛸 때 부지런히 여행하라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작은 추억 하나가 6학년 올라간 내게 첫 선물로 주어졌다. 5분쯤 인사를 하고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책을 읽으며 제주로 설렘을 안고 출발했다.


좋은 사람, 편안 사람과 동행하는 여행은 기쁨이자 축복이다. 굳이 볼거리를 찾지 않아도 도로가의 즐비한 동백꽃과 푸른 하늘과 하늘을 담고 있는 파란 바다가 담긴 해안가를 달리니 다시 나를 객관적으로 본다. 내가 만든 어둡고 좁고 폐쇄적인 틀에서 벗어나 소소한 행복의 가짓수를 창밖을 보며 손꼽아 헤아린다.


믿음이 있다고 이 땅의 고난이 나를 피해 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관점을 수정해서 고난을 맞설 힘을 갖는 게 주님이 내게 바라시는 것이 아닐까... 어린 시절 숨은 그림 찾기를 즐겨했다. 복잡한 그림이란 세상 속에서 감춰진 정답을 찾을 때 느꼈던 성취감과 기쁨! 나는 다시 그 그림판을 들고 서 있다. 쉬운 것부터 차근차근 풀 힘이 제주의 잔잔한 날씨에서 감사를 다시 배우며 생긴다.



사랑하는 주님, 고단한 삶 속에 함몰되게 마시고 제게 주어진 진정한 축복을 날마다 헤아리게 하소서. 제가 아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고 사랑합니다. 다시 일어나는 이 딸과 영원히 잡은 손 놓지 않고 동행하소서!


멋진 날, 아름답고 행복한 날. 다시 일어날 수 있게 용기를 준 새해 첫 여행이다. 올 한 해 오뚝이 같은 믿음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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