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가장 보통의 연애'는 김한결 감독의 4번째 필모그래피이다. 영화에 대해서문외한이다 보니 사실 몇몇 메이저급 감독 외에는모른다. 내 영화를 고르는 기준은- 그저 단순 무식하게 남녀 배우의 연기력이나 평소 팬심을 반영하여 보고자 하는 작품을 선별한다.
그래도 여성 감독의 시선으로 연애와 사랑을 어떻게 버무리고 양념할지 궁금했다.
올 한 해 나 역시 열심히 달려왔다. 12월쯤 되니 기진맥진, 휴식이 필요했고 짬을 내어 며칠 나만의 휴가 계획을 짰다. 독서와 영화 감상하며 빈둥거릴 것... 음장르는?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은 주제의 영화를 고르던 중 제목이 눈에 확 띄었다.
우선 보통이라는 그 말이 좋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거창하고 대단한 사랑, 연애일수록 드라마에서 뻔한 스토리로 끝나는걸 종종 보았다. 그리고 '보통'이 란말 앞에 붙은 '가장'은 싱겁게 너무 뻔한 평범함만은 아니라는 암시로 읽혔다.
제목이 주의를 집중시키자 내가 다음으로 눈여겨본 것은 여자 주인공이었다. 그녀는 로맨스 영화에 딱 걸맞은 내가 느끼기엔 한국의 맥 라이언 같은 여배우다.
공효진, 난 그녀의 적극적인 팬은 아니지만 우연히 드라마에서나 영화에서 그녀의 연기를 접할 때는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에 매료된다. 그냥 보통의 우리 이웃집 언니, 누나, 딸... 친근해서 좋고 인공적인 느낌이 없어 좋다.
그런 그녀가 '가장 보통의 연애'란 작품의 여주니 나한테는 재미를 보장하는 보증수표인셈이다.
바람난 여자 친구에게 오히려 파혼을 당한 재훈(김 래원)은 지질하게도 매일 술에 취해 살아간다. 다음날 아침 재훈은 자신의 휴대폰에서 모르는 번호의 누군가와 2시간이나 통화한 기록을 발견하고 당황하지만 얼마 후 그 상대가 바로 어제 들어온 신입 여직원 선영임(공효진)을 알게 된다.
선영은 바람피운 남자 친구에게 맞바람 피우면서 이별을 고한 당차고, 쿨한 여자로 새 직장으로 출근한 첫날, 그 광경을 재원에게 들키고 만다.
만난 지 하루 만에 둘은 서로의 과거를 공유하게 되고 둘은 회사 동료임에도 불구하고 일보다는 사적인 일로 자꾸만 얽혀가는데...
영화의 첫 장면은 술 취해 비틀대며 전 여자 친구에게 계속해서 메시지를-수신은 되지만 답장은 안 함.- 보내는 재훈과 계속 걸려 오는 전 남자 친구의 전화를 수신 차단하는 선영의 모습을 대비되어 보여주고 있다.
재훈은 바람피운 여자 친구를 못 잊고 술에 절어 사는 순정남 캐릭터를, 선영은 바람피운 남자 친구를 칼같이 끊어 내는 똑 부러진 성격의 캐릭터를 휴대폰이란 장치를 통해 단적으로 나타냈고이러한 첫 장면의 남녀 주인공의 캐릭터와 상황의 대비는 앞으로 전개될 로맨스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학창 시절 내내 관심을 집중시킨 건 하이틴 로맨스의 가장 이상적인 남녀 주인공의 꿈같은 이야기였지만 시간이 흐르고 내가 생활인으로 살다 보니 그런 이야기는 정말 동화 속이나 가능한 현실감 제로의 이야기들이었다.
'가장 보통의 연애'는 첫 씬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주위에 있을법한 내 조카, 내 아들, 딸같이 인물이 실제 인물들처럼 입체감이 느껴졌다.
이별에 서툰 재훈, 준비 안된 이별로 질척대는 어찌 보면 순정남? 또 어찌 보면 진상남? 선영 또한 이별에 대처하는 자세가 처음부터 쿨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수많은 이별을 겪으며 상처 받지 않기 위해 강한 척- 자기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막상 똑 부러지고 시니컬하게 "사랑에 환상 없어요. 남자는 많이 만날수록 좋아요. 그놈이 그놈이에요." 재현에게 외치면서도 막상 재현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하고... 평생 서로 바라보면서 같이 늙어 가는 것, 그게 인생에서 진짜 행복한 거 아니니?"라고 진심을 쏟아낼 때는 술 취한 척 재현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순정녀의 면모도 지니고 있다.
30중, 후반 직장 남녀의 사랑이야기. 쓸데없는 환상이 없어 좋았고, 대사가 밋밋하지 않고 톡톡 튀어서 좋았다.
"난 처음 헤어진 남자한테부터 걸레 소리 들었어. 남자들한테는 섹스 못 해본 첫사랑 한 명 빼고 여잔 다 걸레잖아."라는 선영의 대사는 남성 위주의 왜곡된 성의식과 편견에 대한 일침 같아서 통쾌했다.
다른 로맨스 코미디가 그러하듯 이 작품도 해피엔딩으로 끝맺는다. 마지막 엔딩 재훈의 대사 "나도 보고 싶었어..." 술 취했을 때에만 용기를 내어 진실을 말하던 두 사람이 이제는 멀쩡한 정신에서도 마음에 담아놓은, 하고 싶은 말을 고백하는 것으로해피하게 정석으로 끝난다.
가볍게, 즐겁게, 유쾌하게 볼 목적의 영화로는 적합한 작품이었다. 우리가 흔히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여주인공 캐릭터-괴로워도 슬퍼도 무한정 참는 스타일의 순정파-가 아닌 것이 제일 맘에 들었다.
재훈도 개인적으로 아들이었다면 정신 차리라고 뒤통수를 한 대 때려줄 캐릭터인데, 백마 탄 왕자님이 아니어서, 허당이어서 더 현실적이었다. 이런 살아 있는 캐릭터는 김래원, 공효진의 리얼한 연기로 완성도를 높였다.
헤어진 연인을 못 잊어 매일 술만 마시는 남자를 연기한 김래원은 진짜 순도 백 퍼센트의 순정남 같아 내 마음이 짠했고 할 말 다하는 당찬 여자를 연기한 공효진은 선영에 정말 빙의된 것 같았다.
다만 '가장 보통의 연애'가 직장 동료끼리 얽히는 이야기라 불가피하게 동료나 회사를 배경으로 에피소드가 진행되는 건 맞지만 로맨스와 풍자(직장동료들이 삼삼오오 모이면 사실의 진위여부를 가리지 않은 채 뒷담 화하며 그것을 짚고 넘어가면 쿨하지 못한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나 막상 자신의 문제로 닥치면 여지없이 바닥을 드러냄.)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 해서 주제가 좀 분산된 느낌이 들었다.
또 초반부와 후반부에 편의점 앞 친구와의 만남도, 대사도 너무 작위적이어서 극의 흐름을 방해했다. 주인공이 친구에게 하는 대사는 곧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메시지인데 뜬금없이 오랜만에 만난 동창에게 주절대는 느낌이었다. 좀 더 자연스러운 장치나 필연 관계가 부족했던 것 같다.
공효진과 김래원 그리고 정웅인, 장소연, 강기영 등의 빛나는 배우들이 버무려져 맛깔난 로맨스물로 탄생할 수 있었는데... 아주 조금 아쉬운 건 김한결 감독이 로맨스뿐 아니라 풍자나 해학을 두루 담아내려다 보니 약간은 싱거운 맛?
그래도 내 마음의 별점은 5점 만점에 별 4개~~
지고ㆍ 지순한 영원한 사랑의 판타지에 식상하신 분~~~~~~
여기 이 시대의 리얼한 연애담, 조금은 발칙하고 조금은 삐딱한 보통의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