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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손 Jan 05. 2021

문학이 나의 삶에 주는 풍요함.

 새해 벽두부터 여유롭게 좋아하는 책들을 읽게 된 것은 순전히 싱글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다. 아들이 하룻밤 자고 가긴 했지만 그래도 이틀의 휴일이 남은 덕에 방해하는 사람도 없고 즐거운 책과의 동거를 시작했다.

 매년 새해가 시작되면 꼭 다짐하는 것이 '올해는 책을 많이 읽자.'구체적으로 한 달에 몇 권 이상 읽을 것을 정해  놓지만- 제대로 지킨 적은 거의 없어 올해는 아예 독서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혹 부담감이 계획을 이루는데 방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자연스레 읽고 싶을 때 틈틈이 읽는 것이 몇 권을 완독 하는 의미에 초점을 두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여겨졌다.

 요즘 건망증이 심해서인지, 내가 기억력이 나쁜 건지 책을 읽어도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면  까마득히 내용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가고 그저   내가 '저 책을 읽었구나.' 하는 기억만 남을 때도 있다. 아니 어떤 때는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제목인데 하고 책을 들춰보다 내가 오래전 읽은 책임을 발견할 때도 있다.

 그래서 올 해는 새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읽었던 책중에 좋았다고 기억된 책들을 일부는 골라 다시 읽어 보고 싶었다. 이것이 올해의 나의 독서 계획이라면 계획이다.

 새해의 시작은 조카가 너무 재미있다고 권해 준 안데르센상 수상 작가 제임스 크뤼스가 쓴 '탈러 팔아버린 웃음'이란 장편 소설이었다.

 또 다른 책들은 몇 년 전에 읽은 시집 한강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와 쥐스킨트의 '콘트라바스'이다.



 '팀 탈러 웃음을 팔아 버리다.'는 인간에게 왜 웃음이 필요한지, 웃음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이 얼마나 삭막하고 불행한지를 잘 나타내 준 웃음의 철학이 담겨 있는 책이었다.

 한강의 시집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시 곳곳에 영혼의 상처와 외마디 비명이 들려오는-험난한 인생에서 상처 받은 인간이 순수를 지키려는- 절규였다. 몇 년 전에 읽었을 때도 무거운 마음으로 책을 덮은 기억이 나는데... 이번에도 역시 그녀의 피 흘리는 언어가 가슴에 돌덩어리 하나를 얹어 놓았다.

 연휴의 말미를 장식한 책은 역시 10년 전쯤 읽었던 쥐스킨트의 단편소설 '콘트라바스'이다. 요즘 다시 내가 좋아하는 작가 쥐스킨트의 작품을 찾아 읽고 있는데 책장을 뒤적이다 발견한 쥐스킨트의 콘트라바스의 스토리가 가물가물해서 선택했다.

 머릿속에 지우개가 들었는지 문학작품을 잃고 돌아서면 얼마 못가 잃어버리곤 하는데... 그래도 나는 왜 시간과 돈을(개인적으로 책을 빌려 읽는 것보다 사는 것을 좋아한다.) 문학작품에 투자하는 걸까?


 "그냥 취미생활이고 책 읽기가 좋아요."라고 말하기엔  내 경우엔 백 퍼센트 솔직하지 못한 대답이다. 읽는 즐거움만이 아니라 나는 그 안에서 나의 부족한 지식을 채우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엿보고 체험하고 공감하면서 편협했던 나만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고 싶다. 즉 읽는 즐거움에 나의 삶을 더 풍성하게 할 수 있는 수단으로 문학작품은 그 기능이 추가되는 것이다.

 다양한 세계와, 다양한 인간 군상이 나오는 세계로 우리는 시시각각 초대된다.

 "삶은 메타포(은유)이다." 영화의 한 대사이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내가 연휴 때 읽은 소설이 처음부터 주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면 그 글은 수작이 될 수 없었다. 스토리와 여러 상황ㆍ장치를 통해 독자를 이끌고 독자의 내면을 흔들고 독자의 생각을 움직여 그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찾을 수 있게 했다.

 우리가 사는 삶은 거대한 심해이고, 고해다. 쉽고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난해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이다. 수많은 수수께끼 같은 삶을 풀어내기에 우리는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이 필요하고 실제 다 경험할 수 없기에 문학을 통해  우리는 삶의 폭을 넓혀 나갈 수 있다.


 혹자는 이런 나에게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읽고 나서 뒤돌아 서면 잊어버리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우고(그래서 중요한 문장 등은 필사로 남겨 놓는 친구들도 있음), 문학작품을 읽는 것이 눈에 띄게 삶의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지 않냐고...

 맞다. 단기간에, 순식간에  삶을 풍성하게도 나의 번민이나 문제의식이 달라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문학 작품을 가까이하는 것은 서서히 스며드는 내면의 활동이다.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용해되기 때문에 그 과정을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스토리는, 작가는 기억이 안 나더라도 책을 읽을 때 의식 깊숙이 빨려 들어 그 느낌만은 몸속 어딘가에 흔적처럼 남아 있는 것 아닐까.

 내가 몇 년 전의 읽었던 한강의 시집을 다시 펴 들며 핏빛 비명을 떠올린 것처럼  그때의 감정은 고스란히 내 몸 어딘가에 남겨 있었고, 쥐스킨트의 콘트라바스의 소심한 오케스트라 단원 콘트라바스 주자의 지질한 소심한 삶도 우리네 소시민 삶의 모습으로 씁쓸히 또렷하게 기억되었다.



 문학은 삶을 일거에 변화시키지는 않을지라도 무의식에 남아 삶에 면면히 영양을 미치는 것은 아닐까? 계속 input(투입)하면 output도(산출) 제대로 나오지 않을까?


 아무튼 나는 문학 작품을 통해 나의 생활 반경이 넓어진 것은 확실하다. 소심하고 겁 많은 아줌마에게 여유와 삶에 풍성함이 그리고 자유로운 영혼과 자신감이 주어졌다.

 작품의 상황과 주인공들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생각하는 힘을 기를 수 있고 삶의 통찰력 또한 길러진다. 이러한 다양한 경험은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게도 하고 이미 가진 가치관을 더욱 공고히  하게도 한다.

 문학작품은 내 삶에 있어 나의 삶을 미지의 인물과 세계로 이끄는 도구다. 작품에서는 나는 어디든지 갈 수 있으며 별의별 인간 유형을 다 만나 볼 수 있다. 몰랐던 지식도 습득하게 되고 내 불안의 원인과 그 해법이 무엇인지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다...


 문학을 통한 상상이 없었으면 내 삶은 비루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위로가 필요하고, 억지로라도 힘을 내야만 했을 때 어쩌면 누군가의 한마디 말보다는 책에서 읽은 한 구절이 나의 마음을 움직이고 다시 일어서게 했는지도 모른다.

 비록 가진 것은 없어도 타인의 마음을 읽는 공감 능력과 여유는 후천적으로 책 읽기를 통해 습득된 장점 아닐까?

 종종 깜박거리는 치명적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내 삶도, 앞으로의 내 삶도 문학을 통해 더욱 풍요로울 것이라는 확신 한다.

 더디지만 무의식 깊은 곳에 뿌리를 깊게 내리는 작업일 테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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