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일을 참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과일은 딸기다. 모양도 예쁘고, 색깔도- 먹음직스럽게- 곱고 맛도 새콤하니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인다.
거기다 그 향기는 얼마나 달콤한지... 어린 시절 그 좋아하는 딸기를 먹다가 장염에 걸려서 고생하는 중에도 미련하게 딸기를 끊지 못하고 먹어대는 통에 증상을 악화시켜 한 달을 설사로 고생한 적이 있었다.
결혼해서 임신했을 때 입덧이 심해 5개월째까지는 다른 건 제대로 못 먹었어도 싱싱하고 향긋한 딸기만은 소쿠리에 담은 채로 먹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런지-아들도 태중에서부터 그 오묘한 맛을 익혀서-아들 역시 딸기 킬러다.
오늘 낮에 마트에 갔다. 마트 입구에 탐스런 과일들이 진열된 사이로 빨갛고 싱싱한 딸기가 단연 돋보인다. 홀린 듯 그 앞으로 갔다.
가격표가 먼저 눈에 확 들어온다. '14000원' 헐 500g에...
만지작거리던 딸기팩을 조심스레 내려놓는다. 잃었던 입맛이 돌만큼 벌써 군침은 돌지만, 예쁜 접시에 가지런히 담아져 나올 딸기의 요염한 자태가 떠올려지지만 혼자서 저 비싼 걸 먹기엔 내가 이미 생활인이 다 되었다.
급 우울해져서 500g에 딸기의 삼분의 일 가격인 방울토마토를 사들고는 얼른 집으로 돌아왔다.
'이 혹한기에, 하우스에서 막 출하되어서 나오기 시작한 딸기니 비싸겠지. 조금 지나면 가격이 내리겠지... 저 가격이면 사과가 몇 갠데... '
'그래도 그렇지. 먹고 싶은 것은 먹고살아야지...'
집으로 돌아와서도 한참 동안 마음속의 두 마음이 번갈아가면서 실랑이를 벌였다.
그러고 보니 올해엔 긴장마와 태풍으로작황이 안 좋은 탓에 과수 농가도 큰 피해를 입어서 수확량도 줄고 과일값도 올라서 여름철부터는 좋아하는 과일을다양하게 맛보지도 못하고 가격이 저렴한 것 위주로 구입해 먹었다.
주머니가 가벼워도 먹고 싶은 것만은 꼭 먹고살았는데, 코로나 상황이 길어지고 내 구직활동이 길어지니 자연스레 부식비까지 줄이게 되었다.
물론 과일 한팩 못 살 형편은 아니지만... 스스로가 생각해도 좀 구질구질하지만- 먹고 싶은 것 다 찾아 먹어가면서는- 이 보릿고개(?)를 못 버틸 것 같은 위기감이 드는 게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오늘 마트에서 직접 눈으로 본 딸기의(나는 주로 온라인몰에서 장을 본다.) 자태는 얼마나 고혹적인지... 너무도 강렬해서 순간 구매할 뻔했다.
허리띠 졸라매고 견디기를 수개월째인데 왠지 한번 무너지면 짠순이 생활이 버티기 힘들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것도 나 혼자 입 호사 누리자고 거금을 쓰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지금 나는 과일 하나라도 기회비용을 고려해 구입해야만 했다.
그날 오후 꿩 대신 닭으로 가장 예쁜 접시에- 방울토마토를 플레이팅 해서 딸기이거니 하고 먹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무뚝뚝한 분이셨다. 그래도 딸들한테는 가끔 "허허허"웃으시기고 하셨다. 엄마, 아빠가 생업으로 늘 바쁘시기도 하셨지만 두 분 다 말수가 적으시고 자식들한테 이래라저래라 직접적으로 훈육하시는 스타일이 아니셔서 우리 삼 남매는 각자 알아서 자기가 본 대로 느낀 대로-나의 경우는 책을 통한 간접경험으로 내 나름의 가치관 형성에 도움을 받았다.-성장했다.
지병이 있으신 아버지로 늘 집안 공기는 무거웠고 나는 일찌감치 '결혼'이란 제도로 탈출했다.
나는 부모님 슬하에 있을 때는 '부모님이 우리를 많이 사랑하고 계시는구나.'라는 느낌은 특별히 못 받았는데(워낙 표현을 안 하시는 분들이라) 결혼하고 가끔씩 친정에 가면 특히 그 무뚝뚝한 양반인, 아버지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직접 장을 봐오셨다.
입덧으로 고생할 때가 겨울이었다. 아무것도 먹을 수 없어서 한 달 동안 친정에 가 있었다. 마침 막 하우스 딸기가 출하되던 시기였다.
아버지는 그 비싼 딸기를 몇 팩씩 사 와 다 나를 먹이곤 하셨다.
내가 철이 늦게 들어서 그때야 '아버지가 나를 정말 사랑하시는구나'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딸기를 보면 아버지가, 입덧할 때 먹던 그 맛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는 13년이 흘렀지만 아직 마음은 많이 그날처럼 아프다. 이맘때 딸기 철이 되면 아버지가 더욱 그리워진다.
지금 요양원에 계신 엄마도 나의 미련한 딸기 사랑을 아신다. 엄마랑 같이 지낼 때 장을 보시면 꼭 딸기를 사 오시곤 했는데..,
이제 엄마는 그 기억조차 잊었을지도 모른다. 점점 기억이 희미해지시겠지.
내 나이쯤 되면 (반백이 넘은 )어느 것 하나 의미 없고, 추억 없는 것은 없다. 딸기조차도 내겐 하나의 과일이 아니라 부모님이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끈끈한 무엇이다.
갑자기 부모님이 하시던 말씀이 떠오른다.
"네가 잘살면 제일 돈을 알차게 팍팍 잘 쓸 물건인데.., "
"쓸데없는 옷, 살림살이 사지 말고 잘 먹어라. 엄마처럼 골다공증 걸리면 안 돼."
딸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던 딸이 혼자 먹기 아깝다고 못 사는 걸 보시면 잘한다고 좋아하실까?
내가 아는 부모님이라면 왠지 많이 슬퍼하실 것 같다.
겉옷을 입고 다시 마트로 향했다. 빨간, 맵시 나게 잘 뻗은 자태의 딸기들 중 고르고 골라 하나를 장바구니에 담는다.
흐르는 물에 정성껏 씻어 꼭지를 잘 따서 연블루톤의 오목한 접시에 담았다. 먼저 눈으로 즐기고 다음 코끝으로 향긋한 딸기 냄새를 맡는다.
맛을 즐기기도 전에 입안이 상큼해진다.
한 잎 베어 무니 입안에 과육이 새콤달콤하게 씹힌다.
'14000원의 행복이다. 딴 곳에서 아끼면 되지. 나는 소중하니깐. 아니 뭐라고 해도 내가 나를 위해주지 않으면누가 나를 위해 주겠어?'
이러니 저러니 사설은 길지만, 코로나가 좀 사람을 모양 빠지게-궁색하게-하지만 잘 먹고 스트레스 안 받는 것도 아끼는 것 못지않게 이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