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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손 Jan 07. 2021

기다림의 미학

눈 오는 날에...

 저녁 8시쯤 미경 씨한테 전화가 왔다.

 "밖에 함박눈이 오네요~  눈 오는 거 아세요? "

 그녀는 잔뜩 들떠 당장이라도 밖으로 달려 나갈 기세다. 읽던 책을 덮고 창가로 가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미경 씨 말대로 온 세상이 눈으로 덮여있다. 거리에 차들은 느리게 천천히 미끄러져 가고 이미 밤이 내린 아파트 단지 내 공원 쪽에서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뚜벅이이고 잘 넘어지는 나는'눈'하면 별 감흥이 없고 귀찮기만 한데, 오늘은 낼 출근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밤 하얗게 날리는 눈송이가 어쩜 그리도 아름다운지... 한참을 창가에 서서 눈 오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고즈넉한 밤에 소리 없이 쌓이는 소복한 눈과 한 권의 시집- 지금 이 순간은 온전히 '나'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이 겨울 한가운데에, 저 눈 덮인 언 땅 밑에 이미 봄의 씨앗이 자라고 있겠지... 하얀 뼈마디같이 앙상한 가지들이 겨울바람에 외마디 비명을 질러댈 때도 나는 그 안에서 봄을, 생명의 탄생을 고대했다.

 두근거린다. 생명은 순환하고 곧 다시 시작되는 것이므로 1월의 엄동설한이 난 오히려 반갑다. 동이 터오기 전 새벽이 가장 밝은 것처럼 겨울이 깊어졌다는 것은 이제 곧 죽음(소멸)에서 깨어나  생명으로 탄생되는 것을 뜻한다.

 나는 얼마 전까지 겨울이면 매번 우울증이 심해질 만큼 겨울나기를 힘들어했다. 자연의 섭리, 순환을 신뢰하면서도 겨울이 주는 황량함이 나의 황폐함과 어딘지 모르게 닮아있는 것 같아 그냥 본능적으로 싫고 서글펐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현실을 오래 부정하며 피했다. 그러나 문제를 피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다리고 믿어보기로 했다. 나를, 자연의 섭리를... 겨울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닌 시작이며 자연의  거대한 자궁이라는 것을-그 안에 생명의 씨앗들이 잉태되어 자라고 있다.- 생각하니 더 이상 겨울은 내게 시리지도, 절망적이지도 않은 자연의 일부일 뿐이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부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느낀다. 바람 부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태어난 가치가 있는 건 아닐까?


  진정한 믿음과 진정한 희망은 기다림 속에 있다. 나의 조바심과 성급함은 항상 초조함으로 나타나 신경쇠약적 반응을 가져왔다.

 그러나 자연을 보라! 묵묵히 계절마다 자기 소임을 다하는 불변의 법칙 앞에 기다리지 못한, 신뢰하지 못한 나는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얼어붙은 땅 밑을(절망)을 뚫고 나올 힘이 씨앗은 분명히 있다는 것을 나는 매해 눈으로 보면서도 왜 절망하고, 믿지 않고, 기다리지 못했을까...

 씁쓸하게도 나도 눈에 보는 현상들만 좇고, 그것만 믿으려 하는 성급함이 이미 몸에 배었나 보다.

 이제 겨울은 내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자연의 순환의 일부일뿐. 나뭇잎은 바람에 원을 그리며 떨어지고 그 떨어진 잎들은 거름이 되겠지.

 나는 다시 깊어 가는 겨울을 보며  새롭게 피어날 축제의 현장-봄을-기다릴 것이다. 사물을 직면하니 또렷이 실체가 보인다.


 우울증과 10년쯤 동행하니 터득한 지혜다. 그것조차 내 마음의 일부이거늘 부인하고 적대시할수록 내가 더 힘들었다는 거. 어떤 때는 내 의지나- 마음으로  약으로도- 조절이 잘 안될 때도 있지만 다독이는 마음으로 기다려 줄 수 있는 아량도 필요하다.

 내 경우엔 빨리 회복하려고 욕심을 부릴 때마다 더 낭패를 본 경우가 많다.

 사람들이 우울증을 의지의 문제로 한정 지어 버릴 때 그들의 시선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나의 성급함이었다. 나  스스로가 치유될 수 있게 기다려 주는 것이 맞았다.

 지금은 많이 자유롭다. 사람들 시선에서도 내가 나를 보는 시선에서도 우울증 환자라는 사실이 부끄럽지는 않다.

 지금 보이는 내 모습이 전부가 아님을 나는 잘 안다. 저 황량한 대지처럼 시간이 흐르고 언 땅이 녹으면 나도 씨앗으로, 꽃으로  피어나겠지...

 그때를 기다리고 싶다.


 밤이 깊었다. 사방은 고요하고 모든 소음마저 잠이 들었다. 의식은 점점 또렷해진다. 눈으로 덮인  세상이 동화 속 세상 같다.

 아침이 되면 모두 일상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한파에 꽁꽁 얼었을 도로가 걱정된다.

 어젯밤엔 센티한 시인이었는데 오늘은 넘어지면 골절을 걱정해야 하는 보통의 아줌마이다.

 하지만 두 모습 다 나의 모습이다. 어느 때는 장바구니 물가를 걱정하고, 어느 때는 인간의 원초적 고독에 힘들어하고, 또 어느 때는 창작의 즐거움과 막막함- 양가감정에 들뜨기도 절망하기도 하는 이다.

 인생에서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으면서도 지금까지   잘 해결 못하는 게 있다. '때를 기다리는 것.'

 시간이 흐르면 분명해질 일들조차 나는 그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조바심을 냈다.

 그러나 이제는 알겠다. 저 광활한 자연 앞에서 그가 내게 주는 속삭임을 듣는다.

 작년의 삶은 죽었고 나는 올해 다시 태어나지.

 그 죽음과 탄생은 끝없이 반복한단다.

 네가 기다리는 동안 언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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