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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손 Feb 17. 2021

조카와 초콜릿

새해 앤 부자가 되고 싶어요.

 2월 중순인데도 함박눈이 오전부터 쏟아진다. 지난겨울에는 날씨가 따뜻해 눈을 보기가 힘들었는데 올해는 예년보다 춥고 눈도 풍성한 겨울이었다.

 아침을 서둘러 먹고 한 손엔 우산을 받쳐 들고 한 손엔 테이크 아웃한 커피를 들고 동생이 출근하고 조카들만 있을 집으로 향한다. 참 이상하다. 낯익은 풍경도 눈이 오는 날은 낯설고 이국적이고 아무리 보잘것없는 거리도 몽환적이다. 카메라에 필터를 새로 끼우고 세상을 바라보는 느낌. 그래서 눈 오는 날은 아름답다. 물론 현실의 난 골절을 걱정하는 중년의 여성이지만 그래도 우주의 신비로운 마법에 경이를 표하고 싶다.

 눈을 밟고 걸어갈 때마다 뽀드득뽀드득하고 나는 소리가 듣기 좋다. 동심으로 돌아간 듯 기분이 유쾌해졌다. 눈 오는 날이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방과 후 친구랑 둘이 친구 엄마가 하시는 점포에 놀러 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인데- 그사이 함박눈이 소복이 쌓여 아이들 눈에는 집으로 가는 방향이 다 거기에서 거기로 보이게 되었고- 더욱 곤란했던 것은 친구 엄마가 갈 때 차비하라고 주신 돈을 둘이 집을 찾아갈 수 있을 자신감으로 군것질을 해버린 것이었다.

 눈 덮인 동네를 헤매고 헤매면서도 친구랑 같이 있다는 든든함에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 씩씩하게 버텼고 나는 변죽도 좋아 지나가는 여학교 다니는 언니에게 사정 설명을 하고 집으로 가는 차편의 방향을 묻고 차비까지 얻었다. 그날 집에 어둑어둑해서 들어갔고 그동안 우리들을 찾는 부모님들은 사색이 되었고  난 집에 도착해서 엄마를 놀라게 한 벌로 종아리를 맞았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모두가 넉넉지 않은 시절이었지만 마음만은 따뜻했던 시절이었다.



 방학이어서 그런지 아이들이 10시가 넘었는데도 내가 들어온지도 모르고 쌕쌕 잠만 잔다. 동생 같으면 고래고래  소리쳐 깨웠을 텐데 ㅎㅎ 난 동생보다는 한 옥타브 낮춰서 일어나라고 소리친다. 아침도 동생이 차려놓고 간 그대로다. 개학이 코 앞인데 그동안 비대면 수업이 길어서 잘 적응하겠나 나도 걱정이 앞선다.

 그래도 세상사 근심 없이 태평스레 자고 있는 조카들이 예쁘기만 하다. 큰 아이는 내 소리에 눈을 끔뻑거리더니 다시 감고 작은 아이는 미동조차 없다.

 큰 조카는 올해 고등학교 입학하는 여학생인데 아이들 때문에 자꾸 올라가는 엄마 목소리가(동생) 창피하다고 동생을 구박(?) 좀 하는 것 같다.

 몇 번 소리치고 깨우다 시간을 보니 11시가 넘었다. 아예 이른 점심을 준비해 놓고 깨워야 될 것 같아 자게 내버려 두고 주방으로 왔다.

 거의 점심이 준비될 갈 무렵 큰 아이부터 깼다. 잠이 많아 별명이 북극곰인 여학생이다. 자도 자도 잠이 쏟아질 나이 그때가 지금 돌이켜보니 호시절이었다. 어제 늦게 잠이 들었다고 내게 너스레를 떤다.

 둘째도 부스스 일어나 내게 인사한다. "사랑해요. 이모."까지 덧붙인다. 사랑하는 조카로부터 듣는 이 말은 엔도르핀을 샘솟게 한다. 사내아이지만 집안에서 애교를 담당하고 있다.



 점심을 먹는 도중 작은 조카가 "이모 지난번에 이모가 사주신 초콜릿 먹고 싶어요."하고 내게 말한다. 동생네 갈 때 나는 가끔 내가 디저트로 맛있게 먹었던 것들이 있으면 기억해 두었다가 조카들을 위해 사들고 간다. 친구 카페에서 파는 수제 초콜릿이 맛있길래 몇 번 사들고 왔는데 누구보다 작은 아이가 좋아했다.

 "당연하지 시주고 말고 그 대신 밥 많이 먹고 야채도 다 먹어야 돼." 나의 말에 "네"하고 씩씩하게 대답한다.

 나는 친구 같은 엄마, 친구 같은 이모가 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아이들한테는 어떤지 모르지만 조카들이 허물없이 굴면 좋다. 그런데 작은 녀석은 내게 허물없이 굴다가도 내가 용돈을 줄라치면 펄쩍 뛰며 극구 사양한다. 어쩌다 간식을 사달라고 하기는 하는데... 어린 소견에 가난한 이모에게 용돈을 받는 것보다는 간식을 얻어먹는 것이 덜 부담을 지우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조삼모사)

 그렇다고 모든 어른들의 용돈을 거절하는 것은 아니다. 열네 살 소년답게 쓸 곳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으니 친지들이 주시는 용돈은 덥석덥석 잘 받는데 나한테만 유난히 까다롭게 군다.



 작은 조카가 초등학교 다니던 어느 날 내가 조카한테 물어본 적이 있다. "이모가 주는 용돈이 싫어?" 하니 "아니오."그러더니 이모는 돈이 없지 않냐고 되물었다. 왜냐고 물으니 이모는 집이 없어 외할머니네 살잖아요...

 아무튼 아이의 어떤 기준이 내가 가난한 모, 불쌍한 이모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뭐랄까 좀 머쓱하면서도 나를 배려하는 어린 조카의 마음에 뭉클했다. 집안에서는 철없는, 생떼장이 막내여서 동생의 속을 태우기도 하지만 사람에 대한 정과 세심한 배려는 조카가 타고난 것 같아 마음이 흐뭇했다.

 최근에는 와플이 먹고 싶다고 사달라고 해서 제일 맛있는 것으로 사 오라고 했더니  그중 저렴한 것으로 골라오더니 와플을 정확하게 반을 잘라 괜찮다는 내게 이모 드시라고 내민다.

 그런 조카가 초콜릿이 먹고 싶다고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걸로 보아 많이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더욱이 녀석은 초콜릿을 좋아하는 초콜릿 대장이다.

 주머니가 가벼워도 먹는 것은-특히 아이들 먹는 것은 좀 비싸더라도 좋은 재료로 만든 것을 고집한다. 조카들에게 사다 준 초콜릿은 생수제 초콜릿으로 맛이 부드럽고 깊이감이 있어 한번 맛본 사람들도 그 맛에 빠져든다. 그러니 초콜릿 대장의 미각은 당연히 그 달콤함을 기억할 것이다.



 나도 이모들에 대한 좋은 추억은 있지만 아쉽게도 이모들이 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정하고 따뜻한 분들이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어려운 분들이 이모들이어서 나는 조카들이 태어날 때부터 좋은 이모, 친근한 이모가 되는 것이 나의 소원이었다. 다행히도 나의 바람대로 조카들은 나를 편하게 따른다.

 나는 엄마라는 호칭 다음으로 이모라고 불리는 것이 좋다. 직장 다니는 동생을 대신해 이이들의 유년시절을 돌본 까닭인지는 몰라도 아이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항상 정겹고도 따스하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 마음도 훈훈해지고 뭐라도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다.

 

 눈이 그쳤다. 점심을 먹고 큰 아이는 디저트로 애플파이와 우유를 작은 아이는 바나나를 먹는다. 두 녀석 다 이모 몫을 챙긴다. '내가 이 맛에 살지...'  바람이 많이 분다. 창밖의 나뭇가지들이 심하게 흔들린다.  아이들은 제각각 방으로 흩어지고 나는 어지러 히 널려있는 개수 대안의 그릇들을 설거지하고 식탁의자에 앉아 한참을 글을 썼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동생이 퇴근하고 막 집으로 들어온다. 이제 나의 퇴근시간이다. 아이들이 동생의 기척에 방에서 나온다. 내가 겉옷을 입자마자 작은조카는 "이모 안녕히 가세요. 사랑해요~" 큰 조카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이모 bye~" 어째 좀 남녀가 바뀌었다.



 날씨가 한파주의보가 발령되었다더니 많이 추워지겠다. 여민 옷깃이 무색하게 날 선 바람이 시리다. 우리 조카들이 좋아하는 초콜릿을 파는 곳은 집으로 가는 버스노선이 아니다. 집 앞에 서는 버스가 도착했지만 타지 않았다. 좀 걷고 돌더라도 아이들이 좋아하면 이까짓 추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명희 씨, 다크 초콜릿 주세요."

 "우리 조카가 먹고 싶대요. 호호호 "

 그녀가 초콜릿 상자를 아이스팩에 넣어 정성스레 포장한다. 초콜릿을 받아 들고 좋아할 아이들 얼굴이 떠오른다. 포커페이스인 큰 놈은 무표정이지만 작은놈 못지않게 잘 먹을 테고 작은 녀석이야 두말할 필요 없이 입이 귀에 걸려 "이모 사랑해요. 감사합니다. "하고 노래를 부르겠지...

 생각만 해도 배가 부르고 행복하다. 비록 주머니가 가벼워 조카들을 걱정시키는 이모이지만 아이들 먹고 싶은 간식은 팍팍 사줄 수 있는 부자 정도 되는 건 욕심은 아니겠지. 올해엔 제발 살림살이도 확 펴서 우리 작은 조카가 내가 주는 용돈도 넙죽 잘 받았으면 좋겠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새털같이 가볍다. 황혼 녁의 시간은 개와 늑대의 시간이다. 오늘도 하루를 무사히 보내고 집으로 돌아간다. 아들과 조카들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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