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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피보이 Mar 06. 2022

베팅은 계속된다.

[책] 『도박의 역사』, 데이비드 G. 슈워츠, 글항아리

지금은 세계의 IT를 주도하는 기업들로 FANG('메타'로 사명을 변경한 페이스북, 애플, 넷플릭스, 구글)이나 GAFA(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를 이야기 하지만 10년 전만 해도 IBM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그 당시 IBM의 위상은 빅블루. 빅블루는 우량 주식 가운데에서도 최우량주라는 뜻이다. 100년 넘게 IT업계의 혁신을 선도했던 IBM의 별명이었다. 지금은 애플에 치이고, MS에 얻어맞고, 아마존에 무시당하지만 그때는 기업에서 대용량 서버를 구매하기 위해서는 HP나 IBM 장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업의 흥망성쇠는 참 모를 일이다. 기업사에 있어 '절대'라는 가정은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IBM을 응원한다. 예전의 화려했던 명성과 업계의 혁신을 주도했던 모습으로 되돌아오길 희망한다. 왜냐하면 IBM은 나에게 '라스베이거스'라는 신세계를 경험하게 해 준 고마운 기업이기 때문이다.


10년 전쯤으로 기억한다. 회사에서 데이베이스를 비롯하여 대량의 서버 교체 프로젝트가 있었다. 소위 윈백(win back).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프로젝트 비용이 50억은 넘었던 것 같다. 그 프로젝트의 파트너가 IBM이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수행한 인연으로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렸던 대규모 IBM 행사에 초대받을 기회가 생겼다. 행사 이름이 '임팩트'였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5일 정도 했던 행사 내내 밤마다 라스베이거스 스트립(라스베이거스 대로 남부의 대략 6.1km로 이어진 구간)의 호텔 카지노를 돌며 밤 새 슬롯머신과 블랙잭에 몸과 영혼, 그리고 돈을 바치고, 낮에는 콘퍼런스 홀 한편에서 졸고 있었으니... 아마 라스베이거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라운지에서 줄 서서 반겨주는 슬롯머신의 단아함과 동전 쏟아지는 청명한 효과음에 이미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던 것 같다.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로의 초대, 단어조차 입 밖에 내기 조심스러운 '도박'이라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곳, 화려한 조명과 흥겨운 음악으로 넘쳐나는 거리, 시공간을 뛰어넘어 로마 시대와 베네치아를 경험하게 하는 웅장한 건축물들, 황홀한 공연과 퍼포먼스들... 잔뜩 웅크리고 앉아 모니터에 얼굴을 처박고, 듣기 싫은 상사 잔소리를 백색소음으로 느낄 때까지 도를 닦으며, 오늘도 무사히 지나가길 바라는 일상에서 탈출하여 도착한 신세계. 그때 라스베이거스는 나에게 천국이었다.



이 책 <도박의 역사>는 가벼운 벽돌 책 급이다. 검은 바탕에 황금색 문양으로 치장되어 있는 두꺼운 양장 표지와 펼쳤을 때 마주하는 빽빽한 글자는 강한 압박으로 다가온다. 616쪽이라는 (일단, 500쪽이 넘어가면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다.) 쪽 수로는 만만할 수도 있는데, 판형 자체가 만만치 않다. (무게는 1,016g, 크기는 153*224*35mm 이란다.)

하지만, 압박감을 극복하고 읽기 시작하면 어렵지 않게 읽힌다. 물론,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도시, 카지노 리조트, 호텔, 도박사, 사업가, 정치가, 범죄 신디케이드, 게임 이름 속에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도박', 특히 '카지노'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의 여정은 메소포타미아와 중국의 고대 문화에서 도박의 기원을 찾고, 유럽 대륙의 스파 속에 곁들여진 도박 문화에 머물다가 도박의 상징이 되어 버린 라스베이거스의 흥망성쇠를 지나 가상공간 즉, 온라인 도박까지. 도박이라는 주제 하나로 시간과 공간을 이렇게 꿰어 낸 책이 있을까. 저자는 철저한 문헌과 현장 연구로 도박 발전사에 대한 역사를 서술하고 도박의 세계 전체를 조망한다. 그 속에 이 책의 부제인 '카지노의 흥망성쇠가 드러내는 인간 욕망의 역사'가 충실히 담겨 있다.


이 책의 미덕은 권태에 빠진 어느 단체 관광 가이드 마냥 도박의 역사적 사건만 읊조리지 않는다. 도박에 대한 심리적 관점뿐만 산업적 측면에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구조 속에 카지노 산업을 분석하고 있다. 대공황 시대에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주 정부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꺼냈던 도박 합법화 비책 덕분에 라스베이거스에서 5달러가 100달러가 되는 기적과 0.5달러가 되는 현실을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수많은 영화와 책을 통한 학습은 카지노 하면 자연스럽게 범죄조직이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운영업자들은 1910년대부터 범죄에 몸담았던 금주법 시대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50년대 중년의 나이가 되자 안정적인 삶, 존경받는 삶을 원했고 라스베이거스로 향했던 것이다. 그들의 은퇴와 함께 범죄의 계보를 잇지 않은 이후 세대의 등장. 그리고 대형화된 카지노의 초기 투자를 감당하기에 더 이상 비밀스러운 자본으로는 한계가 오고, 상장기업과 주류 금융권의 자본이 들어오면서 지금의 라스베이거스가 만들어진 과정은 카지노 산업을 바로 보게 한다.


그 외에도 너무나 잘 알려진 샌드위치 백작 이야기라 던 지, 카지노 용어의 기원, 슬롯머신 릴에 왜 과일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지, 도박이 지닌 종교적 의미, 라스베이거스 호텔에 버거킹이 들어오게 사연 등 도박과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물론, 꼭 알아야 할 이야기도 아니고, 안다고 해서 잭팟을 터트릴 수도 없다.



"베팅은 계속된다"라는 에필로그까지 읽고 책을 덮은 시간이 동트기 바로 직전이었다. 새벽 어스름이 베란다 창문을 통해서 열리고 있었다. 아직 익지 않은 태양이 뿜어내는 빛이 바닥에서부터 천천히 내 몸을 타고 올라올 때, 그 빛을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10년 전 라스베이거스 카지노를 밤새 돌며 퀭한 눈으로 바라봤던 그 빛. 2달러 칩을 돌리며 장난치던 손가락 사이를 통과하던 그 빛.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고 몸을 숨기고 싶었던 아담을 쫓았을 것 같은 라스베이거스의 그 새벽빛.

다시 한번 그 빛을 마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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