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밤산책

밤산책 10: 기억의 책장

by 말로

밤산책을 나섰다.

오늘 밤공기가 유난히 상쾌하다.

실제로 날씨가 좋은 것도 있지만, 오늘은 몇 년 동안 벼르고 벼르던 책장 정리를 해냈기 때문이다.

집 안 여기저기 쑤셔 넣어두었던 책들을 한데 모아 정리했다.
세밀하게 분류를 할 만큼의 방대한 양은 아니라서,
크게 책장 반은 문학, 나머지 반은 비문학으로 나눴다.
비록 한 작가의 책이 이 구석 저 구석 흩어져 있는 건 내 게으름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이전보다는 훨씬 가까워졌음에 그들도 만족하리라.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어쩐지 작은 세계를 하나 정돈한 듯한 뿌듯함이 느껴졌다.

책에 쌓인 먼지를 하나하나 닦고,

책장을 꽂으며 책의 물성을 느꼈다.

어떤 책은 표지 이미지만 보아도
읽었을 당시의 감동과 열정이 생생하게 되살아났고,
어떤 책은 책갈피가 꽂혀 있고 귀퉁이가 접힌 흔적도 수 페이지에 이르는데도
도무지 내용이 떠오르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이 책을 읽었다는 사실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가로등 불빛 아래 골목을 지나며, 문득 생각했다.
사람과의 인연도 이와 닮아 있다는 걸.
누군가는 오래도록 기억 속에 살아남고,
누군가는 그렇게 흔적도 없이 잊힌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따뜻한 기억 속 한 페이지처럼 남아 있겠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이미 덮이고도 빛바랜 페이지 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오늘 밤은,
정리된 책장을 떠올리며 마음이 한결 단정해진다.

조금 더 또렷해진 기억들과,
조금 더 부드러워진 망각의 결들이 나란히 놓여 있는 밤.


나는 오늘의 이 산책이 언젠가 내 안의 또 다른 책갈피가 되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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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lJJT00wqlOo?si=UAaRSasnFBeZ7ZU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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