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밤산책

밤산책 15: 어떤 빛은 사라진 뒤에 더 밝게 남는다

by 말로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몸이 무겁고 무기력했다.


오후부터 유난히 피곤했다.

특별히 소모적인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문득 ‘이것도 갱년기의 한 자락일까’ 하는 서글픈 생각이 스쳤다.

그래서였을까, 여느 때면 습관처럼 나섰을 밤 산책조차 망설여졌다.

그렇게 무기력함에 잠겨 그냥 쓰러져 잘까 하다가, 낮에 읽었던 기사 한 편이 문득 떠올랐다.

그 속의 글귀들이 마음 한구석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던 탓인지,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현관을 나섰다.


가로등 아래, 밤공기에 식은 아스팔트 위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동안, 그림자 위로 기사의 내용이 떠올랐다.


평생을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어려운 이들을 돌보았다는 마흔셋 이지혜 씨.

그녀는 갑작스러운 뇌사 판정 후, 장기기증으로 다섯 명에게 새 생명을,

그리고 더 나아가 인체 조직기증으로 백여 명의 환자들에게 회복의 희망을 안기고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여러 내용이 있었지만, 유독 한 구절이 밤늦도록 마음에 깊이 남아 있었다.

기사 말미에, 그녀의 가족들이 남긴 말이었다.

여덟 살 막내아들이 엄마를 기억할 때,

"엄마는 좋은 일을 하고 떠난, 착한 사람이었다고 기억해 주면 좋겠다"는 그 간절한 바람.

나는 그 문장을 길 위에서 몇 번이고 곱씹었다.

한 사람의 삶이, 그 마지막이, 누군가의 기억 속에 ‘착한 사람’으로 남는다는 것.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걸까.


금전이나 명예가 아닌, 누군가의 몸 안에서 다시 뛰기 시작한 심장과 폐, 간과 신장.

그리고 한 아이의 기억 속에 새겨질 "엄마는 좋은 일을 하고 떠난 사람"이라는 문장.

그 문장을 헤아리며 걷는데, 마음 한편이 조용히 무거워졌다.


누군가는 떠난 후에도 이렇듯 여러 생명을 살리는데,

나는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순간 타인의 어려움을 지나쳤던가.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적당한 이유를 찾았고,

공감이 필요한 이야기 앞에서 귀 기울이지 않았으며,

내 삶 하나 건사하기도 버겁다는 생각으로 애써 외면했던 적도 있었다.


물론 모든 이가 그렇게 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평생을 타인을 위해 마음을 쓰다,

자신의 마지막마저 남을 위해 온전히 내어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삶의 모습이다.


그녀는 그렇게 떠났지만, 어떤 빛은 사라진 후에 오히려 선명해진다.

그녀가 남긴 온기는 다섯 사람의 삶 속에서 이어지고,

백여 명의 누군가에게 크고 작은 도움으로 남았으며,

여덟 살 아이의 기억 속에서 소중한 이야기로 자라날 것이다.


이제 나도 가만히 자문해 본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을까.

누군가의 생명을 잇는 거창함이 아니더라도,

그저 누군가의 마음 한편에 작은 온기로라도 남을 수 있다면 좋겠다.


오늘 밤산책은 그렇게,

타인을 위해 살다 간 한 사람의 삶을 되새기며 마무리되었다.


나는 여전히 이 밤길을 걷고 있지만,

그녀는 어쩌면, 누군가의 가슴속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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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NAK0nDfWTKM?si=jT8MOmFC2LK209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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