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밤산책

밤산책 14: 기억이 사라진 길에서

by 말로

오늘 밤, 나는 아득히 오래전의 나를 만나러 길을 나섰다.


삼십 년 세월 저편, 매일같이 오르내리던 고등학교 등굣길이었다.

늘 동네 언저리에 있었지만,

여느 학교들이 그러하듯 가파른 언덕 꼭대기에 자리한 탓에 다시 찾아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 곳.


문득 가슴 한구석에서 그 길을 다시 걷고 싶다는 열망이 피어오른 것은,

오늘따라 빛바랜 시간의 한 조각을 가만히 매만지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주 사적인 의례처럼...


하지만, 막상 들어선 등굣길 초입은 기억 속 모습과 사뭇 달랐다.

낡은 주택들이 있던 자리는 젊은이들의 취향을 한껏 담아낸 세련된 가게들이 대신하고 있어,

익숙한 길의 첫머리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다.


희미한 기억의 조각들을 힘겹게 그러모아 언덕을 올랐을 때,

나를 맞이한 것은 기대했던 정문이 아닌 낯선 후문이었다.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대로 있을 거라 여겼던 것은 나의 나태한 생각일 뿐이었다.


분명 익숙해야 할 풍경인데, 모든 것이 생경하게만 느껴졌다.

늘 드나들던 정문은 어디로 사라졌으며, 수없이 발자국을 새겼던 그 길은 왜 기억나지 않는 걸까.

삼 년이라는 시간을 매일같이 품었던 길 위에서, 나는 길을 잃은 아이처럼 막막했다.


길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내가 그 길을, 그 시절의 풍경을 잊어버렸다는 명징한 사실이 시린 아픔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단순한 길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내 젊은 날의 한 부분이, 기억의 지층 아래로 소리 없이 침잠해 버렸다는 먹먹한 상실감이었다.


한동안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서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교정, 바람에 희미하게 실려오는 도시의 소음만이 나의 정적을 감싸고 돌았다.


흐릿한 잔상처럼, 그 시절의 내가 눈앞에 겹쳐 보였다.

친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재잘거리며 걸었던 앳된 얼굴의 나.

사소한 농담에도 세상이 떠나가라 웃고, 고민조차 순수했던 그 시절,

그렇게 하루하루를 온전히 살아냈던 내가.

기억은 이토록 선명한데, 그 기억의 영토로 들어서는 입구는 망각의 이끼에 뒤덮여 버렸다.


오늘 밤, 내가 산책길에서 마주한 것은 다름 아닌 ‘망각’이라는 이름의, 쓸쓸하고도 아련한 풍경이었다.

그 길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안에 있던 나는 이제 찾아야 할 존재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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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rAXbmSDG-_M?si=ym2Kw2KtsXsTIA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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