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밤산책

밤산책 19: 어느 미국인의 노상바둑

by 말로

오늘 밤도 가로등 불빛에 의지한 채 조용한 길을 걷는다.


지난 주말, 미국에서 일하는 딸이 이른 휴가를 맞아, 미국 친구 아홉 명과 함께 한국을 찾았다. 일본과 제주를 거쳐 서울에 잠시 머무는 일정이었다. 같이 온 친구들을 챙기느라 바쁜 와중에서도 하루, 이틀이라도 얼굴을 마주하고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아쉬운 대로 기뻤다. 평소 영상 통화로는 결코 전해지지 않는, 생생한 딸의 온기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


한국이 처음인 미국 친구들에게 조금이라도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데리고 온 딸 체면도 세워주고 싶어서 야구장도 예매하고, 간장게장 집도 한 달 전부터 예약해 두었다. 그런데, 젊은 친구들이라 그런지 알아서들 여행을 즐길 줄 알았다. 명동, 성수, 홍대, 용산에 걸쳐 고궁부터 맛집까지, 이미 꼼꼼히 계획된 일정이 있었다. 반짝이는 눈동자와 생기 넘치는 목소리에서, 낯선 세계를 맞이하는 젊음이 느껴졌다.


그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한 친구가 있었다. 딸의 친구 중 한 명이 종묘공원에 가고 싶다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그곳에서는 어르신들이 바둑을 둔다고 들었단다. 그들과 한 수 겨뤄보고 싶다는 말에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한국말도 모르는 청년이, 타국의 공원에서 낯선 어르신께 바둑을 청하는 모습이라니. 선뜻 그려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그는 처음에 탑골공원에 들렀다가 장기를 두는 어르신들만 계시기에 종묘공원으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결국 한 어르신과 바둑 두 판을 두었고, 한 판은 이기고, 한 판은 졌단다.


가만 생각해 보면, 그는 원했다면 인터넷으로도 한국인과 바둑을 둘 수 있었을 것이다. 화면을 통해, 번역기를 켜고, 클릭 몇 번이면 어색함 없이 바둑을 둘 수 있는 기술의 시대니까. 하지만 그는 굳이 그 낯선 공원까지 직접 찾아가고, 모국어조차 아닌 말로 인사를 건네며, 직접 앉아 돌을 놓았다. 그 용기와 무모함이야말로, 바로 ‘젊음’이 가진 가장 빛나는 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디지털로는 결코 구현할 수 없는 온기와 긴장, 그리고 마주 앉은 사람의 눈빛과 경험.


‘아, 젊음이란 저런 것이구나.’


낯선 곳에서 주저 없이 현지인의 삶에 들어가 보고, 직접 부딪쳐보는 용기. 어쩌면 지금의 나는 감히 시도조차 하지 못할 그런 도전. 누군가 내게 파리의 뤽상부르 공원에서 현지인과 체스를 두어 보라 한다면, 나는 아마 정색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젊음은 망설임보다 먼저 다가가고, 불완전함보다 호기심이 앞선다. 그게 바로 젊은 날의 여행이 품은 힘이다.


가로등 불빛 아래 길게 늘어진 내 그림자를 바라보며 걷는다. 나는 그런 용기를 가진 적이 있었던가. 돌아보면, 늘 안전한 길만 골라 걸어온 듯하다. 부딪히기보다 피했고, 묻기보다 외워버렸던 날들. 그래서일까, 그 청년의 에피소드는 낯설지만 오래 마음에 남는다. 아쉬움처럼, 혹은 다짐처럼.


이 시대의 모든 젊은이들이 부디 주저하지 않기를. 낯설고 두려운 길 앞에서도, 눈빛을 반짝이며 다가가기를. 세상은 여전히 넓고, 경험은 여전히 아름다우니까. 그리고 나 또한, 늦었다는 이유로 포기하지 않기로. 어쩌면 지금의 나도, 조심스레 한 수 청할 수 있을지 모르니.


https://youtu.be/IUoTjkS242c?si=Jqk97xaGHJ5O4O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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