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마침표를 찍었거나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을 때, 혹은 그저 일상에 틈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나는 광화문 교보문고를 찾는다. 서점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부터 이미 마음은 일렁인다. 나무 패널에 기대앉아 책을 읽거나 음료를 마시는 사람들. 그 곁을 지나는 것만으로도 여유가 번진다. 입구 벽면의 사인회 포스터를 보며 '오, 이 작가도 오네?' 설레어 본다. 정작 줄을 서지도 않을 거면서 마음만은 이미 열혈 팬이 된다.
회전문을 밀고 들어서면 즐거운 방황이 시작된다. 서점과 출판사가 경쟁하듯 추천하는 책들 사이에서 행복하게 길을 잃는다. 오른쪽 자기 계발 코너에서 늦었지만 기합을 넣어볼까, 아니면 왼쪽 인문학 서가에서 이제라도 제대로 된 어른이 돼볼까?
서점 밖에서 내 어깨를 짓누르던 것들—내일의 마감, 꼬여버린 인간관계, 막연한 미래—은 힘을 잃는다. 대신 '무슨 책을 먼저 집을까' 하는 지엽적이고 단순한 고민이 그 모든 걱정을 집어삼킨다. 서점 안, 나는 수많은 저자와 커피 없는 커피챗을 나눈다.
서점은 감정의 롤러코스터다. 우연히 펼친 책에서 빼어난 통찰을 발견해 저자 소개를 들춰보니, 나보다 한참 짧은 시간을 건너온 작가였다. 그 짧은 세월 동안 어떻게 이런 내공을 쌓았을까. 압도적인 결과물 앞에 서면 자괴감이 든다. 반면, 완성도가 부족한 책을 만날 때면 묘한 용기를 얻는다. '이런 글도 책이 되는구나.' 지나친 자기 검열을 내려놓게 만드는 헐거운 책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러다 오늘, 작은 울림이 긴 여운으로 남는 장면을 목격했다. 남색 앞치마에 "신입 교육 중입니다"라는 명찰을 단 청년. 한 손엔 바구니를, 다른 한 손엔 주문서로 보이는 종이를 들고 서가를 누비는 그를 보았다. 아마도 온라인 주문 도서를 미리 챙기는 바로드림 서비스인 듯했다.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책을 집는 그의 손끝이었다. 그는 진열된 책 중 가장 앞에 있는 책을 무심코 집지 않았다. 굳이 손을 더 깊숙이 뻗어,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책을 조심스레 꺼냈다. 나 역시 책을 살 때면 왠지 남들의 손이 덜 탔을 것 같은 뒷줄의 책을 고르는데, 그 청년은 남을 위해 그렇게 하고 있었다.
가장 앞에 있는 책을 꺼낸 들 화면 너머 고객은 알 길이 없다. 얼굴도 모르는 타인의 책을 마치 자신이 소장할 책처럼 소중하게 대하는 태도가 귀해 보였다. 단순히 회사 매뉴얼일지도 모르지만, 내 눈에는 '배려'라는 단어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서점을 나서는 내 양손은 어느새 묵직했다. 분명 구경만 하러 왔건만. "책은 읽으려고 사는 게 아니라, 산 책 중에 읽는 것"이라는 김영하 작가의 명언을 위안 삼아 또 한 무더기를 안고 서점 문을 나섰다. 바깥바람이 제법 매섭지만, 마음 한구석은 훈훈했다. 두 손에 가득한 책 때문인지, 그 청년 때문인지 모르겠다.
https://youtu.be/rVN1B-tUpgs?si=6_KOlXq6rKptPw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