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져야 본전으로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

by 말로

나이가 들수록 많은 것들이 무뎌진다. 뾰족했던 호기심이 뭉툭해지고, 사진 같던 기억력이 흐릿해지고, 유행에 민감했던 안테나는 어디에 처박아 두었는지 찾을 수가 없다. 거기에 한 가지를 더 얹자면, 새해에 대한 소망과 기대감이 무감각해진다는 것이다.


어느덧 달력이 바뀌고 새해가 왔다. 예전 같으면 새 다이어리의 빳빳한 종이 냄새에 설레고, '올해는 기필코'라며 주먹을 쥐었을 테지만, 언제부터인가 '해피 뉴 이어'라는 인사가 짐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해가 떴을 뿐인데, 숫자 하나 바뀌었다고 의미를 부여하는 게 쑥스럽기도 하고 무의미해 보이기도 했다.


내게 남은 시간에 더 이상 극적인 반전은 없을 거라는 예감 때문일까. 새로울 것 없는 전개 속에서, 별다른 기대감 없이 권태스러운 소설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뻔한 스토리와 클리셰가 반복되는 지루한 드라마를 보는 것만큼이나, 나에게 새해는 맥 빠지는 일이었다.


며칠 전, 참으로 뜬금없는 부고 문자를 받았다. 사회 초년생 시절, 야근을 밥 먹듯 하며 동고동락했던 옛 직장 동료의 부고였다. 그의 조부상도 아니고, 부모상도 아닌 본인 상이었다. 평촌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날, 마침 겨울비가 내렸다.


그의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지병이 있었던 것도, 사고가 났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며칠 전 회식을 마치고 "감기 기운이 좀 있네"라며 들어갔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고 했다.


이제는 감기가 다 나았는지 영정 속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빈소에는 국화 향과 향 냄새가 진동했다. 정작 본인이 주인인 자리는 처음이라 낯설 텐데......익숙하지 않은 냄새를 삼일 내내 맡고 있으려면 그가 꽤나 힘들지 않을까, 문득 그런 걱정이 들었다. 소설이라면 어떻게든 뿌려놓은 떡밥을 회수했을 텐데, 인생은 그럴 준비도 없이, '끝난다'는 예고도 없이 이렇게 툭 하고 끝나버리는구나 싶었다.


그날 밤, 꿈에 그가 찾아왔다. 함께 일했을 때 그는 말도 많았고 꽤나 수선스러웠는데 웬일인지 조용히 책상에 앉아 있었다. 가만히 보니 일하는 책상이 아니라 내가 그 회사에 들어갔을 때 면접관으로 앉아 있던 그였다.


그가 일하면서 자주 했던 말을 나에게 건넸다.


"밑져야 본전이지."


그냥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찾아와 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눈을 떴을 때 창밖으로 희미한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비는 그쳤다. 나는 다이어리를 꺼냈다. 며칠째 펼쳐보지도 않았던 새해 첫 장이 하얗게 비어 있었다.


밑져야 본전. 그의 말이 자꾸 맴돌았다.


나는 펜을 들고 다이어리에 적기 시작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야기라면, 굳이 서둘러 결말을 떠올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한 줄, 두 줄 적다 보니 오늘 하루가 조금은 단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일이 온다면 또 적으면 되고, 오지 않는다면 여기까지인 것이다. 그래도 적어둔 문장 몇 줄 쯤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가 남기고 간 말처럼, 밑져야 본전쯤으로 새해를 맞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https://youtu.be/XhT2WZptAOE?si=QqPdMEqgxmDKETm_


이전 04화귀걸이를 찾아주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