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를 잡으러 떠난 사람

by 말로

얼마 전, 안성기 배우가 세상을 떠났다.


부고 기사를 접한 순간, 마음 한구석이 묵직해졌다. 한 시대의 배우가 사라졌다는 상실감도 있었지만, 내 유년의 한 시절을 채웠던 이름 하나가 저물었다는 쓸쓸함이 더 컸다.


학창 시절, 나는 영화감독을 꿈꿨다. 그 꿈을 핑계 삼아 교과서보다 비디오테이프를 더 열심히 들여다봤다. 그 무렵 한국 영화를 섭렵하면서 안성기라는 이름을 피해 가는 건 불가능했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의 덕배부터 <실미도>의 684 부대장까지. 그가 보여준 수많은 얼굴들은 하나같이 강렬했지만,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단 하나의 캐릭터가 있다.


바로 영화 <고래사냥>의 '민우'다.


영화 속 민우는 낯설었다.

때 묻은 낡은 롱코트에 헝클어진 머리, 거지 왕초 행세를 하며 세상 편하게 웃던 그 남자. 멀쩡한 허우대를 하고서 알 수 없는 궤변을 늘어놓거나,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그의 모습은 어린 내 눈에 그저 실없는 주정뱅이의 객기처럼 보였다.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를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그때는 왜 그리 허황하게 들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나 역시 세상에 부딪치며 여기저기 깎여나가고 나서야, 민우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숨 막히는 규범과 체면치레 속에서 모두가 숨죽이던 시절, 그의 기행은 미친 짓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이 정해놓은 규격에 갇히지 않겠다는 선언이었고, 껍데기뿐인 위선을 벗어던진 날것 그대로의 자유였다. 그는 가장 밑바닥의 모습으로 가장 높고 푸른 이상을 노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나는 그럭저럭 살아남았다.

꿈이 뭐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 없고, 열정이 뭐냐고 물으면 민망하다. 그런 것들은 어느 순간 내 삶에서 희미해져 버렸다. 남은 것은 안전한 선택, 무난한 하루, 그리고 적당한 타협뿐이다. 민우는 온몸으로 부딪쳐 깨트리려 했던 그 견고한 세상의 벽 안에서, 나는 안락함을 느끼며 안주하고 있다.


민우가 던진 질문 앞에서, 나는 아직도 답을 못 하고 있다.

나는 과연 나의 고래를 잡았는가, 아니면 잡으러 갈 용기라도 내어보았는가.


그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질문은 내 안에 남아 있다. 어쩌면 내가 죽기 직전까지도 이 질문을 붙들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때 가서야 나는 대답할 수 있을까. 고래를 잡으러 떠나지 못한 채 늙어버린 이 삶이, 그래도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아있었노라고.


민우, 안녕.


https://youtu.be/JRk-COfStk8?si=iwow5aqxud4-axd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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