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는 착각, 그리고 22줄의 백지

by 말로

요즘 나를 가장 괴롭히는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과연 이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몇 년 전부터 만지작거리기만 했던 ‘정보관리 기술사’ 자격증 공부를 결국 시작했다. 큰맘 먹고 학원을 등록했고, 소프트웨어 공학 토픽부터 하나씩 정리해 나가며 답안지 작성 연습에 들어갔다.


기술사 시험은 최첨단 IT 기술을 다루지만, 그 방식은 지독하리만치 아날로그적이다. 컴퓨터도 아닌 검은색 볼펜 한 자루에 의지해, 총 400분 동안 22줄짜리 답안지를 쉼 없이 채워야 한다. 머릿속 지식을 도식화하고 핵심 키워드를 논리적으로 엮어 손으로 써 내려가는, 정말 무식하고 정직한 노동이다.


국가기술자격의 최고봉답게 합격률은 3% 남짓. 퇴근 후 하루 3시간 이상을 꾸준히 갈아 넣어야 짧게는 6개월, 길게는 3년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물론 이 통계조차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틴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


수백 개에 달하는 IT 토픽을 마치 검색창에 엔터를 치면 결과가 나오듯, 내 손끝에서 줄줄 쏟아내야 한다. 이 무모한 레이스를 보고 있자면, 중도 포기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인간적인 면이 느껴질 지경이다. 반대로 그 좁은 문을 뚫고 합격한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존경을 넘어 경외심마저 든다.


AI가 코드를 짜주고 챗GPT가 논문을 요약해 주는 시대에, 이런 원시적인 시험이 과연 적합할까? 수많은 생각이 들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내 머릿속에 지식이 완벽하게 구조화되어 있지 않다면, 결코 이 백지를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지난 20년 넘게 IT 업계에서 밥을 먹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답안지 앞에서 펜을 쥐고 끙끙대다 보면 근본적인 회의감이 밀려온다. '어떻게든 구현할 수 있다'는 것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은 같은 말일까? 안갯속에서 희미한 실루엣만 보고 "저건 차, 저건 자전거"라고 짐작했던 것을, 나는 여태껏 '안다'라고 착각하며 살아온 건 아닐까.


이런 지적 오만은 독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책을 눈으로 읽었다고 해서 그 내용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활자가 내 안에서 소화되어 나만의 언어로, 나만의 통찰로 다시 나올 수 없다면, 나는 그저 지식이라는 거울에 잠시 내 얼굴을 비춰보고 만족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무모한 도전을 완주해 보고 싶어졌다. 지금 내 수준은 에베레스트 등반을 앞두고 이제 막 매표소 앞에 서 있는 등산객 같다. 물론 에베레스트에 매표소가 있을 리 없지만… 마음가짐이 그렇다는 얘기다. 하지만 한 발 한 발 내딛다 보면, 오늘 하루를 충실히 적다 보면, 언젠가는 정상 비스무리한 곳에라도 닿아 있지 않을까.


비장한 각오로 기술사 공부를 선언하자, 아내가 툭 한마디를 던졌다.


"작가 되신다며? 소설 쓴다며? 장르가 바뀐 거야?"


가만 보니 그렇다. 소설이나 기술사 답안지나, 무언가를 써 내려가야 하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게다가 모르는 문제도 아는 척 썰을 풀어야 하는 그 영역까지 비슷하다.


나는 여전히 무언가를 쓰고 있다.


'소설 쓰는 기술사'.


이 희한한 혼종이 인생 후반기에 새로운 장래 희망이 될 줄이야.


https://youtu.be/4VR-6AS0-l4?si=U_8qgggutJ1mMl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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