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들어 정면을 보니, 칠판 위 액자에 담긴 붓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깨어있는 사람이 되자"
급훈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강산이 세 번이나 변했는데, 다시 교실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성인에게는 다소 작게 느껴지는 나무 책상에 몸을 웅크리고, '정보관리 기술사' 시험지를 노려보고 있는 내 모습이라니.
공부를 시작한 지 고작 두 달. 시험 형식이 어떤지, 답안지는 어떻게 생겼는지 겨우 파악한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염치없이 올해 첫 시험에 접수했다.
목표는 단 하나. '버티기'였다.
100분씩 이어지는 4교시의 지옥 훈련을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앉아 있는 것. 비록 답안지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엉뚱한 소설을 쓰는 한이 있더라도, 빈칸 없이 채워보자는 오기였다. (채점 위원님들께는 미리 사죄의 말씀을 올린다.)
결전의 날, 며칠째 이어진 강추위가 유독 매섭게 느껴졌다. 아침 8시 30분 입실. 심장이 묘하게 쿵쾅거렸다. 합격을 기대할 리 만무한데, 이 떨림은 뭘까. 생각해 보니 대입 학력고사 이후 처음 치러보는 국가 고시다. 새로운 전장에 들어서는 병사의 설렘, 혹은 두려움 같은 것이었으리라.
시험장 풍경은 내 예상보다 훨씬 비장했다.
정보관리뿐만 아니라 소방, 화공 등 여러 분야의 기술사 시험이 동시에 치러지는 건물 안은 긴장감으로 팽팽했다. 30대 초반의 젊은이부터 백발이 성성한 어르신까지 연령대는 다양했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하나의 공통된 '결기'가 서려 있었다.
그 비장함은 책상 위 '장비'에서 증명되었다.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해 고무 그립을 덧댄 볼펜들, 빠르고 쉽게 집어 들 수 있도록 자석 손잡이를 개조해 붙인 템플릿 자, 그리고 책상 모서리에 테이프로 야무지게 고정해 둔 휴지 조각. 볼펜 똥을 닦아내기 위한 그 처절한 디테일을 보는 순간, 나는 압도당하고 말았다. 손때가 꼬질꼬질하게 묻은 서브노트는 그들이 갈아 넣은 시간의 두께를 말해주고 있었다.
옆자리의 중년 남자는 눈을 감고 기도하듯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었다.
퇴근 후 쏟아지는 잠을 쫓으며 스탠드 불빛 아래서 버텼을 밤들, 새벽 어스름 속에 노트를 펼쳤을 간절한 시간들. 그 숭고한 노력 틈바구니에 '경험 삼아' 놀러 온 내가 끼어 있어도 되는 걸까. 괜스레 죄송하고 부끄러웠다.
나도 언젠가 저런 결기를 갖출 수 있을까. 저들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드디어 시험이 시작되었다.
1교시 100분, 2교시 100분… 총 400분의 사투.
손목은 끊어질 듯 저려오고 허리는 비명을 질렀지만, 나는 버텼다. 비록 정답이 아닌 '창작 소설'을 쓰고 있을지언정, 종료 벨이 울릴 때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마지막 4교시가 끝나고 시험장을 나서며 차가운 칼바람을 맞았을 때, 이상하게도 승리감 같은 게 느껴졌다. 이 무모한 버팀이 쌓이고 쌓여, 언젠가는 진짜 합격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
물론 현실은 냉정했다. 지난 회차 614명 응시 중 합격자는 단 6명.
게다가 두 달밖에 공부하지 않았음에도 '기본 토픽'이라 불리는 문제들이 꽤 눈에 띄었다. 차라리 아예 모르는 외계어 같은 문제들이 나왔다면 마음이라도 편했을 텐데. "조금만 더 제대로 볼걸" 하는 아쉬움이 뼈를 때렸다.
미래가 뻔히 보이면서도 현재를 준비하지 않고, 과거만 후회하는 사람.
오늘의 내가 딱 그 꼴이었다.
"깨어있는 사람이 되자"
교실에서 본 급훈이 다시 머릿속을 스쳤다.
깨어있다는 건 무엇일까. 막연한 미래를 꿈꾸기보다 지금 내 눈앞의 문제에 집중하는 것. 훗날 후회하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 볼펜 똥을 닦아내며 한 줄이라도 더 적어 내려가는 것. 그게 나에게는 깨어있는 사람이 아닐까?
집으로 향하는 길, 칼바람이 다시 코트 깃을 파고들었다.
나는 옷깃을 잔뜩 세우고 걸음을 옮겼다.
마치 황야의 결투를 끝내고 돌아가는 서부 영화의 카우보이처럼.
비록 총알은 다 떨어졌지만, 말 위에서 떨어지지는 않았으니까.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겨우 시작이다.
https://youtu.be/Pt1pOY3_W64?si=2F1gBWtXRU1ROj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