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탐욕적으로 살기로 했다.

by 말로

“방광암이 의심된다는 소견이 나왔습니다.”


2주 전, 소화기내과 진료실에서 의사가 무심하게 던진 한마디였다. 지방간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간 자리였다. 그의 모니터에는 CT 결과지가 떠 있었고, 검은 바탕 위에 희미한 흰 무늬들 사이로 화살표 하나가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성문종합영어로는 이해하기 힘든 영문 소견들 사이에 유독 눈에 박히는 단어가 있었다. ‘cancer’ 그 순간 앞뒤 문맥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단어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간에 쌓인 지방 수치가 얼마나 심각한지 들으러 왔건만, 뜬금없이 방광암이라니. 파스타를 먹으러 갔더니 식전주로 뽀얀 막걸리 한 사발이 나온 꼴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놀라기도 전에 황당함이 먼저였던 모양이다. 내 표정에서 아무것도 읽지 못했던 의사가 한마디 덧붙였다.

"별로 놀라지 않으시네요."

놀라봤자 어찌하랴. 애써 쿨한 척 대답했다.

"아직 확정은 아니잖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비뇨기과 진료 예약을 하고 병원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머릿속이 꽉 찼다. 방광이라면 소변이라도 보고 비울 텐데, 머릿속에 꽉 찬 생각들은 내 마음대로 비울 수가 없었다. 갑상선암 수술을 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는데 또 다른 암 걱정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내 몸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잊으려고 일찍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그런 밤이 며칠 계속되었다.


길을 걷다 골목 한편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보거나, 유튜브에서 폭식을 하는 영상들을 보면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신이 보시기에 기특할 정도로 살지는 않았어도, 몸을 막 굴리지도 않았다. 규칙적으로 운동했고, 식사도 절제했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건강은 타고난 팔자라지만, 억울한 마음은 숨길 수 없었다.


그렇다고 억울함만으로 이 시간들을 버틸 수는 없었다. 뒤척이는 밤들 속에서 생뚱맞게 컴퓨터 알고리즘 하나가 불현듯 떠올랐다. '탐욕 알고리즘(greedy algorithm)'이라는 것이 있다. 컴퓨터가 복잡한 문제를 풀 때 사용하는 방식인데, 멀리까지 내다보고 완벽한 해법을 계산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나아 보이는 선택을 하나 고르고, 다음 순간에 또 그 순간의 최선을 고른다. 그렇게 하나씩 쌓아갈 뿐이다. 최종 결과가 언제나 완벽하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지금 한다는 그 단순한 원칙 안에는 묘한 성실함이 있다. 알고리즘치고는 꽤 문학적이라 기억에 새겨둔 것이었다.


어쩌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도 그것뿐인지 몰랐다. 확진도 아니고, 결과도 모르고, 내일도 알 수 없는 이 자리에서 — 오늘 잘 자고, 내일 검사를 받고, 그다음은 그다음에 생각하는 것. 아직 오지 않은 결과를 끌어당겨 오늘 밤을 허비하지 않는 것. 탐욕스럽게 현재만 사는 것이 오히려 지금의 내게는 가장 현명한 방법인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서야 겨우 눈이 감겼다.


그렇게 뒤숭숭한 날들 끝에 비뇨기과 진료가 왔다. 교수님은 사진을 보고도 판단을 유보했다. 세상에서 가장 믿고 싶은 뜨뜻미지근한 유보였다. 확실히 하기 위해 내시경을 했다. 의사 앞에 모든 것을 내보이는 자세로, 당신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자세로. 결과는 깨끗했다. 이어 MRI도 찍었다. 이상 없음.


곁에 있던 아내가 반색하는 사이, 나는 애써 예상했다는 듯한 폼을 잡았다. 속으로는 생각나는 신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 감사했고, 기억나는 조상님들도 빠짐없이 감사 인사를 드렸다.


의사는 다만 탈장 증세가 약간 보인다고 덧붙였다. 병원에 올 때마다 새 아이템을 장착하는 기분이다. 탈장도 결코 가벼운 이야기가 아닌데, 암이라는 더 센 주먹에 먼저 맞은 탓인지 그다지 아프게 느껴지지 않았다. 두려웠던 것이 두려움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는 날, 사람은 무엇에든 쉽게 감사해지는 법인가 보다.


탐욕 알고리즘은 지나간 선택을 되돌아가 고치지 않는다. 아직 오지 않은 분기를 미리 겁내지도 않는다. 그저 지금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다. 허술해 보여도, 어쩌면 인간이 실제로 쓸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그렇게, 다음을 모른 채 지금을 살기로 한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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