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이 떠났다. 2020년이 떠나면서 바닥에 흘린 아쉬움, 후회, 미련 등을 주섬주섬 주워 2021년에 들고 가볼까 하다 그만둔다. 마음만 쓰릴뿐. 앞으로 동행할 2021년에 발맞춰 가기도 벅차니 말이다. 지나간 점들을 잇지 못한 후회보다 다가올 점들을 이을 소망이 더 가치 있다고 믿는다. 그래도 후회와 미련으로 얼룩진 한 해를 돌아보며 회고할 거리를 찾아본다면...
역시 독서다. 그나마 작년 한 해 꾸준히 해왔던 일. 지치지 않고 했던 일. 스스로 좋아서 했던 일. 하면서 행복했던 일이 유일하게 독서였기 때문이다. 연초에 올해는 몇 권을 읽어야지 하고 독서 목표를 세우진 않는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그저 꾸준히 점을 찍어 이어온 결과를 받아들일 뿐이다. 2020년 독서 기록을 보니 그 이어짐이 '104'권을 가리키고 있었다. '독서량'이라는 한정된 지표로만 봤을 땐 꽤 성적이 좋은 편이 아닌가 싶다. 물론 나만의 절대적인 평가다. 200권, 400권 읽은 분들의 소감이 눈에 밟혀 '이만큼이나 읽었네' 하고 자랑할만한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독서에 있어서 만큼은 '양'보다 '질'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어떤 시공간에서는 100권을 읽을 때 보다 단 1권을 읽을 때 묵직한 중력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런 시공간을 자주 접할 수 없다는 게 아쉽긴 하지만...
책을 사랑하게 된 이후 독서 고백을 할 때마다 곤혹스러운 것은 "책을 그렇게 많이 읽는데 왜 그래?" 같은 시비가 달린 시선이다. 책을 많이 읽으면 뭔가 달라지길 기대한다. 인생의 가치를 깨닫게 되고, 삶의 향기가 다를 것이라 막연히 생각한다. 인생 태도에 대한 기대는 그나마 이해할만하다. 더 곤란한 것은 현실적으로 무엇을 얻었는지에 대한 추궁이다. 자기 계발서 덕분에 회사에서 승승장구하고, 재테크 서적 덕분에 돈도 많이 벌고, 심리학 서적 덕분에 인간관계도 좋아지고... 무엇보다 이것저것 많이 알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아내가 가끔 공격하는 포인트도 이 부분이다. "책은 읽으면 뭐해..." 하고 포문을 열기 시작한다. 때로는 어이없는 공격이 들어오기도 한다. "당신, 잼 하고 마멀레이드가 뭐가 다른지 알아?" 뜬금없는 질문에 멍한 얼굴로 모른다고 하면 "책은 읽으면 뭐해... 그것도 모르면서..." 도대체 마멀레이드 하고 책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
난 그냥 책 읽은 게 좋을 뿐인데...
뭐가 달려져야 하나?
그럼에도 책 읽기를 좋아하면서 나에게 몇 가지 변화가 생기긴 했다.
첫째, 새벽에 저절로 눈이 떠진다. 새벽 시간만큼 자신에게 온전히 바칠 수 있는 시간이 하루 중에 있을까 싶다. 하루가 열리는 하늘을 바라보고 크게 심호흡하고 책상에 앉거나 소파에 편하게 자세를 잡는다. (어떤 책을 잡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책을 펴면 오로지 나와 작가 둘만의 세계가 열린다. 그 시간이 주는 쾌락과 보상을 경험했기에 새벽 책 읽기는 중독이 되고 습관이 된다. 하루 중 힘든 시간을 지날 때나 잠자리 들기 전 온갖 잡념으로 뒤숭숭할 때마다 다음날 새벽이 주선할 작가와의 만남이 설렌다.
둘째, 몸도 건강해지고, 환경에도 보탬이 된다. 책을 읽기 위해서 자가용을 덜 운전하게 된다. 주차의 번거로움이 한몫하긴 하지만 책 읽기에 지하철만큼 좋은 공간도 없다. 이동 시간 틈틈이 책을 펼쳐 짬짬이 읽는 재미가 솔솔 하다. 간혹 책에 빠져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치는 난감한 순간도 경험하지만, 실소 정도로 무마할 수 있는 난처함이다. 자가용을 운전할 때보다 오래 서있고, 많이 걸을 수 있다는 점. 자가용을 운행하면서 내뿜는 배출 가스를 줄여 미세먼지 저감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이 건강과 환경을 동시에 챙기는 일이다. 간혹 종이책을 읽는다는 자체가 환경 파괴가 아니냐는 의문에 대해서는 아래 기사로 위안을 삼는다.
한국제지연합회 관계자는 “과거 종이 생산은 곧 환경 파괴라는 부정적 인식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 조림지 관리가 체계화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난히 흰 종이를 선호하는 탓에 국내에서는 책에 재생지를 잘 사용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책 제작에 따른 나무 훼손이 심하지 않다”며 “국내 제지업체들은 주로 해외에서 펄프를 들여오는데, 인증받은 해외 조림지에서만 펄프를 들여오기 때문에 환경 파괴 우려가 크지 않다. 또 책 종이는 수차례 재사용하는데, 일반적으로 책에 사용됐던 종이는 화장지나 생리대 제작에 이용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현재 국내에서 사용되는 종이의 75%는 폐지를 재활용한 것이며, 나머지 25%만 순환 경작으로 수급한 나무를 펄프로 가공해 제작되는 상황이다.
(출처: 서믿음, "종이책 vs 전자책... ‘무엇이 더 친환경 독서법일까?'", <독서신문> 2019.11.26)
셋째, 약속 시간에 늦지 않는다. 바쁜 일상에서 책 읽을 시간을 조금이라도 챙기려다 보니 생기는 선한 부작용(?)이다. 어쩌다 외부 약속이 잡히게 되면 약속 장소나 근처에 미리 가서 책을 읽는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아 상대방에게 신뢰도 쌓고, 책 읽을 시간도 가질 수 있으니 이 또한 일석이조 효과다. 혹시라도 상대방이 늦는다고 해도 전혀 짜증이 나지 않는다. 늦으면 늦는 대로 책 읽을 시간이 늘어나니 여유롭다. 하루라는 시간을 보내다 보면 이렇게 저렇게 생기는 틈새가 독서로 메워져 꽉 찬 느낌이 들게 된다.
넷째, 나를 돌아보고, 타인을 이해하고,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조해진 작가의 <단순한 진심> 속 '나나'를 통해 우연히 마주친 타인과의 관계를 소중히 생각하게 되고, 주영하 교수의 <백년식사>를 읽고 나서는 불판 위 삼겹살과 9,900원짜리 광어회의 사연이 남다르게 느껴지고, 김승호 대표의 <돈의 속성>을 읽고 돈을 번다는 것에 대한 올바른 생각과 원칙을 지키는 꾸준함을 무시했던 천박함을 돌아보게 되고, 정재찬 교수의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을 읽고 우리가 살아가는 매 장면 속에서 눈물과 용기를 주는 소중한 시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톰 필립스의 <진실의 흑역사>를 통해 가짜 뉴스가 얼마나 오래된 인류 유산 인지를 알고는 기가 막혔고, 빌 브라이슨의 <바디:우리 몸 안내서>를 읽는 순간에도 번잡스러운 내 몸속에서 경이로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것이 감격스러웠다. 이런 소중한 시간들을 함께 해 준 작가분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저녁 시간. 아내가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는 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던진다. "상대성 이론 좀 설명해 줄래?" 나는 읽고 있던 <아인슈타인의 전쟁>이라는 책을 얼른 덮고 일어난다. 그리고 베란다에 모아둔 재활용 쓰레기들을 챙겨 밖으로 나간다. 지금 아내가 원하는 것이 '상대성 이론' 아님을 안다. 나의 신속한 행동이 아내의 분노 게이지를 지연시킬 수 있다는 것이 내가 터득한 '특수 상대성 이론'이다. 책을 좋아하게 되면서, 좋아하는 일을 오랫동안 하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을 잘 살펴보고 눈치껏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차피 혼자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니까.
이게 책을 좋아하게 되면서 생긴 가장 중요한 변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