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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ia de brunch May 07. 2020

[제주일기 18] 바람이 분다

 태풍 ‘솔릭(SOULIK)’이 오고 있다는 8월의 여름날, 회사에서는 태풍 대비 행동 매뉴얼이 공지사항에 올라오고 비상연락망을 점검했다. 제주에 이제 막 적응을 시작한 육지 것들 사이에서는 제주에 오고 첫 태풍 소식에, 긴장이 감돌았다. 최고 400mm 이상의 집중 호우와 최대 풍속 32m/s이라는데, 숫자들은 잘 와 닿지 않았다. 태풍의 강도는 피해와 손해, 실종과 같은 이웃의 이야기, 내가 당할 수도 있었던 무서움으로 체감됐다. 솔릭이 온 날, 정방폭포를 찾은 관광객이 1명 파도에 휩쓸려 실종됐다. 서귀포 1만 가구 이상이 정전 피해를 입었다. 내가 사는 오피스텔 건물은 지붕이 날아갔다. 폭우와 돌풍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내 방에서도 실외기 실의 문과 창문이 쉴 새 없이 덜컹거리며 태풍이 온다는 소식을 알렸다. 방 창문도 윙윙 흔들리고, 복도에서 부는 바람은 현관문을 흔들어 재꼈다. 앞뒤로 바람이 치는 난타 공연장에 온 줄 착각할 정도였다. 한 번 잠이 들면 좀처럼 깨는 법이 없는데도, 태풍 전 날은 웅웅대는 스산한 바람소리에 새벽에 깨서 텔레비전을 켜고 태풍 소식을 지켜봤다. 게다가 텔레비전이 갑자기 꺼져서, 겁을 지레 먹어 잠이 들 수 없었다. 혼자 사는 다른 동료와 카톡방에서 생사를 확인하며 잠을 설쳤다. 마냥 밝은 줄 알았는데 험악한 모습도 있는 제주의 다른 얼굴을 본 날이었다. 


 서울에 있을 때는 태풍이 오면 비가 많이 오고 바람이 부는 날, 정도로 생각했다. 출근 길이 혼잡하고 지각할지 모르니 조금 서둘러야 하는 불편한 날 정도였다. 전기 공급이 끊긴 가구의 당황스러움, 시설물 유실, 도로가 부서지고 나무가 쓰러지는 풍경을 뉴스 보면서도 남의 일이라고만 여겼다. 항공기 결항으로 밤샌 100여 명의 동동거림과 불편함 정도가 가장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감정이었다. 대체로 태풍은 바닷가 지역과 맞부딪히며 소멸되어 내륙까지 파고든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방폭포에 갔다가 파도에 휩쓸린 관광객도 그러했으리라 짐작해본다. 


 제주에서는 태풍 전야 출근도 어려웠다. 서울에서는 태풍이 와도 교통체증을 걱정하지만, 제주에서는 집 문밖에 나가는 것부터 걱정을 해야 했다. 조용하던 출근길 도로에 나무가 쓰러져 있고, 나뭇잎이 도로를 뒤엎고, 넘어진 나무가 신호등이나 전광판을 밀어내면 2차 사고가 날 수 있었다. 회사에서 5분 거리에 사는 직원들은 우비를 입고 왔는데도 온 몸이 비로 홀딱 젖어 나타났다. 나중에 듣기로 중문 키티 박물관의 마스코트, 키가 2미터는 돼 보이는 키티 동상은 태풍에 모가지가 날아갔다. 말 그대로 동상에 머리가 또깍 떨어져 바람에 주차장을 뒹굴었다고 한다. 제주에서는 해맑은 눈동자와 순진한 노란 코의 귀여운 키티가 모가지만 분리되어 주차장을 뎅그러니 배회하는 풍경이 실존했다. 


 태풍이 오면 제주는 항상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여지없이 한반도로 향하는 태풍의 첫 매를 맞는 곳이 제주도고, 서귀포는 그중에서도 뺨을 가장 먼저 맞는 위치다. 거의 뺨을 갖다 대주는 자리선정이라고 볼 수 있다. 태풍이 오기 며칠 전부터 하늘이 흐리고 비가 흩뿌린다. 전조증상과 태풍이 지나가는 모든 길목에서 몸살을 앓는다. 제주에 오고 무자비한 자연의 무서움을 실감한다. 태풍은 서울에 가려는 모든 비행기의 발목을 잡고, 지하 주차장을 물바다로 만들었고, 서로의 안부의 끈을 놓지 않는 밤을 기억 속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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