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삭빙삭 숲 내음 따라
남자 친구와 올해 여름휴가는 제주도로 정했다. 정했다는 능동적 표현보다는, 제주에 오자마자 해외로 여름휴가를 갈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정해졌다는 수동형이 맞겠다. 아무튼, 늦여름이 기승을 부리는 8월 15일에 우리는 서귀포 치유의 숲을 찾았다. 치유의 숲은 2016년 개장한 따끈따끈한 핫 플레이스로, 제주에서 숲 좀 다녀봤다는 남자 친구의 취향을 고려해 예약했다. 서울에서는 폭염 때문에 야외활동 주의경보가 하루가 멀다 하고 울렸지만, 나무가 우거진 제주 숲 속은 여름에도 냉장고가 된다. 미리 차롱 도시락도 주문해두었다. 차롱은 제주지역에서 빙떡이나 빵을 담아두던 바구니다. 차롱 도시락 메뉴는 전복과 표고 등이 들어간 전, 과일 조금, 주먹밥이다. 도시락 위에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당신이 있기에 세상이 아름답습니다’ 같은 문구를 직접 쓴 동백 잎이 엄마 글씨체로 장식되어 있다. 마을 부녀회에서 직접 장을 봐서 만들어주는 도시락이라더니, 맛있게 상대가 먹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마음속에 들어와 나무처럼 한 그루 자란다.
치유의 숲은 사람이 많이 찾아주길 바라는 숲이 아니다. 사전예약제로 운영하고, 음식물 반입 제한도 아주 철저하다. (고구마를 싸와서 먹다가 관리자분께 꾸지람 듣는 방문객을 목격했다) 운동화를 신고 오지 않으면 돌아가야 한다. 이런 까다로움 덕에 치유의 숲은 적정한 인구밀도와 깨끗한 산보 길을 유지하고 있다. 숲을 지키는 관리자들의 이런 자비 없는 엄격함, 좋다. 주차장에서부터 기백이 느껴지긴 했다. 제주어로 ‘담배피면 안 되는디’라고 푯말이 가로 새겨 있다. 반말도 존대도 아닌 것이, 흔히 보던 금연이나 흡연금지보다 결연함이 느껴진다. ‘셋또질 하지 말게양’ 은 ‘정문 매표소를 통해 입장하세요’라는 뜻인데, 말게양~하며 애교 섞인 말투인 듯하지만 어미에는 단호함이 느껴진다. ‘뎅기는 질 아니우다’ (탐방로 아님)라는 푯말에서도 동네에서 좀 놀아본 언니가 어깨에 친근하게 손을 올리며 은근한 압박을 가하는 어조가 들린다.
나는 치유의 숲에서 무려 2시간 반짜리 ‘빙삭빙삭 숲 내음 코스’를 예약했다. 남자 친구가 숲을 좋아한다니 아주 그냥 질릴 때까지 숲에 있어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시간 맞춰 입구에 가면 마을 힐링 해설사분이 입구에서부터 나무의 특징, 제주의 토착 문화와 나무에 얽힌 언어를 술술 풀어 설명해주신다. 제주어로 ‘낭’은 나무다. ‘엄부랑’은 엄청나다는 뜻이다. 가베또롱은 가볍게다. 서울말과 어원이 비슷해서 해석을 듣고 나면 아아! 하고 무릎을 친다. 문제집에서 모르는 문제를 뒤쪽 정답지를 보고 나면 아아! 했던 것처럼, 제주어만 보면 짐작도 안 가지만 해설을 듣고 나면 서울말과의 비슷함이나 어원이 이해가 된다.
1시간 넘게 걸어 올라가니 땀은 나지만 여름의 땀이 아니다. 몸을 움직여서 나는 운동성의 땀이다. 힐링 센터에 도착하면 치유의 샘물로 족욕도 하고 목도 축일 수 있다. 나무 그늘 아래는 직사광선 아래보다 최소 3~5도는 시원하다. 가만히만 있으면 여름의 한 가운데일지라도 서늘함을 만끽할 수 있다. 숲의 힐링이란 머리가 맑아지는 청량감의 다른 말인가 싶다.
삼나무와 편백나무
삼나무와 편백나무는 외관이 비슷하게 생겼다. 흔히 히뇨끼로도 알려진 편백나무는 항균 물질을 내뿜어 벌레나 이끼가 잘 끼지 않는다. 나무만 보고 구분하기 어려울 땐, 주변을 봐야 정체를 알 수 있는 나무다. 치유의 숲 쉼팡(쉼터)은 편백나무 군락 아래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2시간 반 코스를 마치고 나서도 쉼팡 편백나무 의자에 앉아 노닥거리다 문을 닫을 때가 되어서야 숲을 나왔다. 숲길을 걸으며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과 누워서 바라보는 하늘은 또 다른 맛이다. 숲에 오니 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치유의 숲에서 난생처음 노루도 봤다. 치유의 숲은 인위적으로 조성한 숲이 아니라, 예전 제주의 화전민도 살았던 원시림에 가깝다. 본래 숲이었던 곳을 다듬어 사람들에게 개방한 것이다. 도시에서는 나무를 나무라고 생각하고, 히뇨끼는 일본 료칸에서나 만날 수 있는 것인 줄 알며 살았는데 이곳에는 60년 된 젊은 편백부터 100년 된 편백까지 엄부랑 큰 나무속에 파묻혀 있을 수 있다. 나무 이름을 배우고, 건강한 나무를 힘껏 끌어 안아보고(트리허깅), 제주어를 익히고, 정성이 깃든 도시락을 먹는 하루. 마음만 먹으면 주말마다 올 수 있는 숲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