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로 이사를 오고 나름 구석구석 탐방을 다닌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집 주변과 익숙해진 곳들을 중심으로만 다니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주는 개발의 때가 타지 않은 곳이 많아 풀이나 나무 넝쿨이 무성하게 엉켜있는 곳들이 많다. 차가 다니는 대로변, 아파트 옆인데도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아 몇 년간 잡초와 풀이 뭉텅뭉텅 자라서 벽도 아닌 것이 담장도 아닌 것이 아래는 쥐나 고양이가 활개 치고 있을지 모를 그런 초록 공간들이 뜬금없이 나타난다. 벌레와 동물도 무섭고 사람은 더 무서운 쫄보라 인적이 뜸하지 않은 곳으로만 다니다 보니, 생각보다 보행 반경이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바다 방향이 아닌, 오피스텔 뒤쪽으로 발길 닿는 대로 발길을 향했다. 중문 마을회관을 지나, 귤 밭이 무성한 마을을 구경했다. 내가 특히 좋아한 동네는 대포마을. 볕이 잘 들고 귤 밭이 드문드문 있고 담장에 울타리처럼 동백도 어여삐 피어있고, 앞으로는 바다가 보이고 무엇보다 한적하고 조용했다. 강아지들도 어슬렁어슬렁 양반걸음으로 동네 마실을 다니는 것만 봐도 평온한 동네임을 짐작케 했다. 귤 밭이 딸린 주택도 좋지만, 삼나무가 5~6미터는 족히 자라 울타리가 된 방풍림도 멋진 풍경이다.
아픈 기억과 난개발의 흔적
마을 주민 센터의 ‘4·3 유족 신고 안내’ 문구를 보면 평화로운 마을에 잔혹한 역사를 떠올리며 이곳이 제주가 맞구나 하는 생각에 잠긴다. 제주에는 귤 밭도 많지만, 귤 밭 안에는 무덤도 많다. 나는 집 바로 앞에, 뛰어노는 길가에 무덤이 있으면 무서울 것 같다고 도시스러운 호들갑을 떨었다. 남자 친구는 남이 아니라 가족묘라면, 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의 무덤이라면 괜찮을 거라고, 이것도 제주의 삶의 방식이라고 설명해줬다.
제주에 초록 귤 밭과 바다와 아름다운 풍광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창 제주 한 달 살기가 유행하고 관광객이 들끓으면서 부동산 투자가 줄을 이었다.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많은 곳에 리조트와 호텔이 우후죽순 생겼다. 문제는 한중관계가 소원해지고 중국 관광객들이 줄어들면서 짓다만 리조트와 호텔이 곳곳에 있다는 점이다. 중문 관광단지로 향하는 길에도 철제 임시 벽들이 공사 현장임을 드러내며 가로막고 있는 곳들이 있다. 짓고 있는 것인지, 언제 완공되기는 할는지 알 수 없는 건물들이 도처에 있다. 철벽 사이로는 관리되지 않은 풀과 나무들이 뒤엉켜있다. 공사가 없는 공사 현장들, 오르다 멈춘 콘크리트 건물들이 산책길에 발에 채 인다. 내가 사는 동안에도 새로 짓고 있는 리조트와 어느 날 갑자기 문을 닫은 호텔들이 있었다. 모 호텔 매니저에게 듣기로, 비행기가 제주에 실어 나르는 승객 수 보다 호텔 방 수가 더 많다고 한다. 호텔 운영이 어려워지고, 사람들이 떠나고, 빈집 타운이 생겨도 난개발의 흉물을 보고 살아야 하는 것은 남겨진 도민들의 몫이다.
언젠가 동네 오피스텔 광고에서 혁신도시에 공공기관이 이전하고 2만 명의 유입인구가 기대된다는 문구를 본 적이 있다. 아마도 우리 회사 인근을 말하는 것 같은데, 제주로 이전한 직원은 넉넉잡아도 100명 정도에 동반한 가족까지 넉넉잡아도 150명 정도다. 어떤 계산식으로 150명이 2만 명에 기여하는지 모르겠으나, 우리 회사 직원 수는 제주 경제에 파급효과를 줄 만큼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제주의 저력
생각해보니 제주는 먹을 수 있다면 모든 특산품을 초콜릿으로 만들어 기념품으로 판매하는 곳이다. 감귤 초콜릿에서 상품에서 멈추지 않고 백년초, 알로에, 한라봉, 복분자, 녹차 초콜릿까지 만들어 패키지로 판매하고 있다. 감귤 교배 연구를 거듭해 한라봉, 천혜향, 레드향, 황금향 등등을 만들어 내고 시장에 판로를 개척해 내는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뭐랄까, 포기는 배추 썰 때나 쓰는 말인 줄 아는 발명가가 제주 특산물 개발을 담당하고 있는 모양이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귤을 넣어본다. 잼이나 감귤 차는 이미 구시대에 개발된 상품이다. 내가 감히 상상치 못했던 콤비네이션 상품으로는 귤 막걸리, 감귤파이, 감귤 통통, 감귤 초코파이, 감귤 초콜릿 화이트, 말린 감귤로 만든 보석귤과 감귤칩, 청귤 약과, 한라봉 타르트 등등. 심지어 흑돼지 육포, 인스턴트 흑돼지 라면도 봤다. 역시 보통 사람들이 아니다.
제주는 역사의 아픔과 난개발의 잔해로 고통받고 있지만, 스스로의 살길과 치유의 방법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을 배운다. 끝없이 나오는 제주 특산품에서도 느꼈지만 다크 투어리즘, 즉 역사를 기억하는 여행 코스를 보면서 다시 한번 깨닫는다. 제주를 만만히 보고 섣불리 들어왔다간 돌하르방 코처럼 큰 코가 뭉툭하게 뭉개지는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