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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낀느 Jan 21. 2024

원, 양력 1월에 매화라니


며칠 전 출근하면서 언뜻 담장을 보다 깜짝 놀랐다. 매화꽃이 피기 시작했다. 

‘아니, 음력 1월에 펴야 할 매화가 양력 1월에 피다니.’

제주도 서귀포 중산간에 위치한 우리 집에 매화가 첫 꽃을 터뜨린 게 1월 17일. 지금은 나무마다 꽃이 만개해 있다.     


하기야 아무리 우리나라에서 가장 따뜻한 서귀포라 해도 1월치고는 기온이 높았다. 낮 최고 기온이 10도가 계속 훨씬 넘었고, 최저기온이 3~8도였다. 어제 기온은 최저 10도, 최고 12도에 비가 왔다. 그러니 꽃들이 착각할 만도 했다. 다음 주에는 눈 예보가 있으니 설중매를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비 개인 주말 오전 카메라를 들고 뜰에 나가보니, 매화뿐이 아니라 다른 나무들도 슬슬 봄 맞을 채비를 한다. 

성질 급한 명자나무가 벌써 한두 송이 꽃을 피웠고, 꽃봉오리들이 오동통하니 곧 나머지 꽃들도 개화할 것 같다. 수국도 하나씩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비 온 후 말간 초록색을 내보이고 있는 게 얼마나 귀여운지 그 모습을 담기 위해 이리저리 카메라 각도를 맞춰본다.


나무랑 사는 삶은 지루할 틈이 없다. 바쁘다는 핑계로 아기자기한 꽃밭을 만드는 것은 포기했지만, 나무들은 때 되면 제 할 일을 하여 미쁘고 듬직한 모습을 보여준다. 곧 감나무도 우렁차게 일어나 키를 활짝 키울 것이다. 서귀포는 비가 많아 매년 감나무가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자란다. 남편이 거의 매년 나무들을 강전정하지 않으면 뜰은 아마 울창한 밀림으로 변할 것이다. 고사리 장마, 여름 장마를 거치면서 커가는 나무들의 기세는 놀랍기만 했다. 기후 탓인지 최근 이 삼년 사이에 나무들이 더 잘 자랐다.


이제 겨우내 담장을 장식하던 동백나무는 꽃을 거의 다 떨구어, 나무 아래 붉은 카펫을 깐 것 같다. 지는 모습도 아름다운 꽃이다. 송창식의 노래처럼 ‘바람 불어 설운 날, 눈물처럼 후드득 지는 꽃’을 보려 올해도 몇몇 농장에 다녀왔다. 백동백과 분홍동백도 색다른 맛이 나지만, 역시 동백꽃은 붉은색 꽃나무들이 한데 모여 있을 때가 가장 감탄을 자아낸다. 하지만 나는 동백충 무서워 꽃 지고 나면 나무 곁에 가까이 가지 않는다.    

 

서귀포의 1월은 감귤이 이제 끝나서, 집 주위 감귤 농장들 나무가 텅 비었다. 대신 한라봉과 레드향이 지금 판매되고 있다. 감귤나무는 몇 년 전부터 심었지만, 우리는 약을 안 쳐서 수확을 못하고 있다. 대신 튼튼한 댕유자는 일 년 내내 우리의 필수 식량이 된다.     


댕유자는 제주 이외의 곳 사람들은 잘 모른다. 나도 제주에 와서 처음 알았으니까. 옛날부터 댕유자는 서귀포 사람들의 겨울 감기약으로 쓰였다. 차를 만들어 먹기 위해 청을 담근다. 한 해는 댕유자 열매가 너무 많아서, 동네의 장구팀에게 나눔 했더니 서로서로 열 개씩 달라고 다툼 했다.      


댕유자의 다른 효능은 숙취에 직빵이라는 것이다. 술 마신 다음날 아침 남편은 한 잔 타먹고 출근한다. 예전에 숙취에 힘들던 아침, 보이차를 여러 잔 마시면서 신묘하게 숙취가 사르르 사라지는 경험을 했지만, 댕유자는 비타민 C가 풍부하고 독특한 맛이 일품인 차이다.      


매화가 폈다.

우리의 일 년 일거리도 시작이다. 뜰 곳곳이 우리 손길을 기다린다. 다음 주에는 댕유자 청도 담가야 하고, 뜰도 다듬어서 봄 준비를 해야 하고, 철 되면 매실청과 매실주를 격년으로 담그기도 한다. 

일거리 가득한 뜰이지만, 변함없이 돌아오는 나무들 덕에 기쁘게 노고를 받아들인다. 우리의 행복은 어쩌면 나무에서 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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