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는 게 상실이 아니라 열린 수확일 때가 있다. 음악을 들을 때 자주 그런 소득을 얻는다. 귀가 깊어져 음악을 품고, 새로운 이해로 나아가는 환희를 알게 된다.
여름에는 평창에 간다. 나는 평창 음악제에 가고, 남편은 친구를 만난다. 두 해 갔는데, 앞으로도 매년 갈 예정이다. 코로나 이후 음악회에 처음 갔는데 고지의 서늘한 기온과 음에 귀가 열리는 소름 돋는 경험이 좋았다. 갖춘 음악을 들어야 행복하고, 거친 음악을 들으면 불편하다. 조악한 음질, 음을 정확하게 내지 못하는 옛날 가수의 리코딩, 아직도 낯선 현대 클래식 곡. 불편한 것은 슬그머니 피한다. 어떻게 보면, 음을 찾아다닌 인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는 어렸을 적 보이 소프라노의 목소리를 가졌다. 일본인 교장이 유학 가라고 할 정도의 미성을 가졌지만, 진도에서 유학이란 언감생심이었다. 변성기를 지나면서 목소리가 변한 게 창피해서 말을 안 했다고 했다.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은 우리 네 자매에게 글자보다 먼저 음악교육을 시키는 것으로 이어졌다.
나와 둘째는 피아노, 셋째는 바이올린을 하다 무용으로, 막내는 성악을 했다. 6, 70년대 부자가 아닌 집에서 자녀들에게 각각 음악교육을 시킨 것은 부모의 보통 의지가 아니었다. 나는 다섯 살에 글자보다 음을 먼저 배우기 시작했지만 지겨웠다. 무거운 책들을 들고 땀 뻘뻘 흘리며 멀리까지 걸어서 레슨 받으러 다니던 기억만 남았다.
“네 몸 덩치보다 레슨비가 더 들어갔을 거다!”
엄마는 큰소리쳤지만, 십 년씩 받은 교육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무도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다. 엄마로선 본전 생각이 날 만했다.
나는 특히 바흐가 싫었다. 하논은 연습하여 숙달되면 손이 빨라지고, 체르니는 번호가 넘어가는 재미가 있고, 소나타도 리듬이 좋았다. 하지만 바흐는 대체 왜 이게 음악적인지 몰라서 어려웠다. 바흐는 어린 가슴으로 느낄 수 있고, 이해되는 음악은 아니었다. 중학생이 되어도 여전히 피아노를 치고 있었지만, 부모님이 치러 가라니 갔고, 잘 치고 싶은 욕심도 없었다.
어느 날 집에 오니 엄마가 젊은 스님이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버지의 친척이던 스님은 토굴에서 정진 중이라고 했다. 얼굴은 질리도록 깨끗하고, 눈코입이 뚜렷하게 잘생긴 분이었다. 눈빛이 시퍼랬지만, 말씀은 어린애처럼 달았다. 그 부조화에 자꾸 스님을 힐끗거렸다.
“한 곡 들려 드리렴.”
엄마의 주문에 심드렁하게 야상곡을 치는데 스님이 숨죽이며 귀 기울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런 세상도 있구나.”
피아노 연주를 다 듣고 나서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번 집에 들른 스님이 엄마에게 말했다며, 엄마는 그 이야기를 두고두고 들려줬다.
“그날 스님이 산길을 돌아 깊은 산중에 있는 토굴로 돌아가는데, 네가 쳤던 곡이 내내 귀에 맴돌더래. 너무나 큰 희열이 느껴져 밤길에 만나는 산짐승들의 불 켠 눈들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더라.”
쇼팽의 힘이었다. 그 만남을 귀히 여긴 스님은 큰스님이 되신 후에도 만날 때마다 배포 있게 용돈을 주시곤 했다.
20대에는 우리 모두 팝송에 빠졌다. 둘째는 기타 치며 폴 사이먼 노래를 불렀고, 셋째는 퀸의 왕팬이 되어 한국 팬클럽을 운영했고, 클래식 기타도 쳤다. 그렇게 세상의 팝 음악을 즐기던 우리가 요즘 단톡방에서는 클래식 음악 연주회와 연주자 이야기를 많이 한다. 인생을 한 바퀴 돌아, 우리가 맨 처음 음악을 배웠던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렇게 이해 할 수 없었던 바흐의 곡이 가장 좋다.
퀸텟을 틀어놓고 작업할 때가 종종 있다.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오중주나, 슈베르트의 현악 오중주, 드보르작의 피아노 오중주, 브람스의 클라리넷 오중주 같은 곡들은 부드럽게 공간을 꽉 채운다. 유튜브는 악보를 제공하기도 해서 곡을 들으며 악보를 읽어나가기도 한다.
오늘은 자비네 마이어의 모차르트 클라리넷 오중주를 골랐다. 현악기가 처음 손짓하고, 곧 클라리넷이 부드럽게 익숙한 멜로디를 시작한다. 따라 하기 쉬운 멜로디는 서로 대화하듯 반복되고, 나도 음을 따라 허밍 하게 된다. 평화로운 휴일 오후에 잘 어울리는 배경음악이다. 이렇게 서로 헐뜯지 않고, 모두가 돋보이게 받쳐주는 음악은 사이좋은 친구들이 웃으며 낮은 대화를 나누는 듯하다.
좀 더 시간이 생기면, 퀸텟 주간을 만들거나, 한 달쯤 할애하여 모든 작곡가의 곡들을 집중 감상하고 싶다.
중학교에 들어간 나는 클래식 음악 밖에 음악으로 안 여기셨던 아버지를 피해 이불속에 숨어서 라디오로 팝송을 들어야 했다. 동생들이 커 가면서 대세가 기울자, 아버지도 포기하시긴 했다. 살금살금 듣기 시작했던 팝송은 반짝반짝 빛나는 신세계였다.
나는 월간팝송 잡지까지 사보면서 역사책처럼 달달 외웠다. 우리나라 방송에서는 팝송 프로그램이 몇 안 되던 시절이어서 늘 AFKN(미군방송)을 듣다가, 늑대 울음소리를 신호로 하는 케이시 케이썸(Casey Kasem)의 ‘아메리칸 탑 40(American Top Forty)’ 애청자가 되었다. 그 프로에서 자주 방송되고, 괜찮다 싶은 곡들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어 인기를 끌었다. 점차 나는 히트송 잘 점치는 애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FM 라디오는 평생 친구였다. 20여 년 전 뉴욕에 살 때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아주 조그만 FM 라디오를 장만했다. 뉴욕에는 광고도 별로 없이 장르별로 하루 종일 음악만 들려주는 방송국들이 있어서, 늘 그 방송들을 듣고 다녔다.
지금은 KBS 콩이나, CBS 레인보우, 혹은 MBC FM을 좋아하는 진행자별로 일하면서나 운전하며 듣는다. 레인보우 방송은 예전 우리 젊었을 때 노래를 많이 틀어준다. 어제는 남편이랑 저녁 하며 그 노래들이 나오는 방송을 듣다 내가 웃었다.
“70년대 듣던 노래를 아직까지 들을 줄이야. 그때는 상상도 못 했네.”
말하자면 백색소음처럼 라디오를 늘 듣고 살았던 세대이다. 그런데 나는 또 변했다. 이제 굳이 백색소음이나 음악 없이 고요한 공간이 더 좋아졌다. 라디오를 졸업했다고 할까. 물론 음악은 졸업한 게 아니다. 하지만 이제 선택적 의지를 갖고 듣는다. 여백이 좋아지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