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나는 독일 프라이부르크(Freiburg)에서 가족과 함께 일 년 살았다. 아이들은 초등학교와 유치원을 다녔고, 나는 독일어 공부하러 다녔다.
돌아와서 처음으로 글을 써서 다른 이들에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가장 애착이 가는 글이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다녔던 많은 곳의 이름이 아니다. 살면서 보고 느낀 것, 그리고 어쩌면 이렇게 우리와 다를까 하고 생각했던 차이이다. 그 기억의 일부를 당신과 다시 나누고 싶다.
독일에서 돌아올 무렵 송별 파티에서 말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독일 생활을 담은 글을 쓰고 싶어요. 제목은 ‘오렌지와 아우토반’이 될 거예요. 독일에서 만난 것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오렌지와 아우토반이라.”
앞집 독일 할머니의 표정이 좀 묘하다.
“오렌지는 독일산 아닌데…….”
스페인이나 모로코에서 오지만 신맛이 없는 달고 산뜻한 오렌지 맛은 꼬맹이와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한국식으로 조리해도 제맛이 나지 않는 음식에 늘 미진함을 느꼈던 우리에게 오렌지는 향긋한 위안이 되었다.
독일에 도착한 다음날 혼자 장 보러 갔다. 7시 조금 넘은 시간인데 전차에는 제법 사람이 붐비고 정육점과 작은 가게들도 막 문 열기 시작한다.
기온이 한국보다 낮아 선뜻하면서도 상쾌했다. 외국의 거리를 이른 아침 혼자 걷는 기분은 홀가분하였고, 흥미로움을 담뿍 느낄 수 있을 만큼 구시가(舊市街)의 Kaiser-Joseph 거리는 매력적이었다. 훌륭한 진열장들이 있는 거리에는 승용차가 다니지 못하고 전차와 버스만 가끔 다닌다. 찻길 어디서나 건널 수 있는 ‘보행자의 거리’, 남독일의 뾰족한 지붕들이 연이어 있는 좁고 볼거리가 풍부한 뒷골목도 정이 갔다.
어젯밤 처음 프라이부르크에 도착했을 때 시내에 들어서자 우선 불이 환한 진열장에 눈이 갔다. 한밤중에는 불 끄는 가게도 있으나 옷가게, 빵집, 심지어 보석상까지 밤새 진열장에는 불 켜 둔다 한다.
“그러나 6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영업이 끝난답니다.”
일주일을 머문 그륀밸더 거리의 이 아파트는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깨끗하고 모던한 스타일이다. ‘모든 유학생의 꿈’ 같은 집이란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부엌과 화장실이 마주 보고 있고, 그 안쪽이 거실. 펼치면 불편하나마 침대가 되는 소파와 식탁 세트와 TV가 있고, 한 구석에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2층 다락에는 주인인 그리스 아가씨의 향이 밴 빨간 담요가 덮인 더블베드가 있다. 비스듬한 천장에는 천장의 경사를 따라 아래에서 30도 정도만 열리는 창이 있는데 그 창을 통해 보면 낮고 멋진 지붕들이 연이어 있는 것이 보인다. 1층에서 2층까지 확 트인 구조라 평수가 작아도 답답하지는 않다.
운전하면서 여행 다니다 보면 아우토반보다 구석구석까지 뻗어 있고 잘 정비된 국도(Landstraße)에 더 감탄하게 된다. 그 길을 참 많이 다녔다. 끊임없이 도로비를 내야 했던 프랑스나 이태리의 고속도로나, 산이 많은 스위스 지형을 살려서 경치는 좋으나 운전하기에 신경 쓰이는 스위스 고속도로를 다니다, 바젤을 지나 독일 5번 도로에 들어서면 벌써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주말에는 2박 3일로 반경 500 km 이내를 여행했고, 부활절이다 뭐다 하여 거의 매달 있던 휴가 때는 일주일에서 열흘씩 왕복 2000km의 파리와 잘츠부르크 그리고 왕복 3000km의 로마까지 다녀왔었다.
아우토반을 달리다 보면 왜 유명한지 알 수 있었다. 4차선 길에 중앙분리대가 확실하게 되어 있고 나무가 심어져 건너편 차들이 거의 안 보여 눈이 피로하지 않았다. 또 길이 아주 직선이 아니고 방심하지 못할 정도로 완만한 곡선이고 급커브는 없다. 그러나 이 쪽은 평지라 그렇지 프랑크푸르트 이북은 산을 따라 경사가 심한 곳도 있고 지형에 따라 다 틀리다. 군데군데 110km 속도 제한이 있어 속력을 낮추게 된다. 우리가 사는 슈바르쯔발트 부근은 숲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거의 대부분 지역에 속도 제한이 있다. 즉 아우토반이라 해서 전 지역에서 속도 무제한의 쾌감을 맛볼 수는 없는 것이다.
가장 감탄하게 되는 것은, 정식 휴게소 말고도 몇 km마다 하나씩 간단한 parking장이 있어 피곤할 때면 언제나 쉴 수 있는 것이다. 나무로 된 붙박이 의자 몇 개와 테이블이 놓여 있어 식사할 수도 있고 어떤 곳은 숲사잇길을 따라 테이블이 놓여 있기도 하다. parking장에서 쉬면서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들을 보면 참 어마무시하게 잘도 달린다 싶다. 같이 달릴 때는 모르는데 정지해서 200km 가까이 달리는 차를 보면 무섭다.
Porsche나 BMW 같은 차들이 1차선에서 200km 가까이 달리다 차간거리 10m 이내로 바짝 쫓아올 때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나는 아이들을 늘 태우고 다니니 되도록 120에서 140 정도로만 다닐 생각이다.
독일인들은 추월선과 주행선의 개념이 확실하다. 2차선을 가다 추월하고 나면 1차선에 뒤차가 없어도 즉각 주행선으로 돌아온다. 그 대신 끼어들기 할 때도 급하게 하고 자주 차선을 바꾸는 편이다. 운전하면서 앞에 차가 많을 때 보면 하도 자주 왔다 갔다 해서 어지러울 정도이다. 그만큼 운전에 자신이 있고 브레이크가 좋아 차를 믿는 것일까?
경비는 여행하기 전 미리 계획 세워, 여행지의 유스호스텔의 4인 가족실을 예약해 대부분 유스호스텔만 이용했다. 그리고 부엌이 있는 유스호스텔을 골라 아침은 거기서 제공되는 식사를 하고 점심은 레스토랑에서 ‘오늘의 메뉴’를 택해서 먹고 저녁은 숙소에 돌아와 푸짐하게 한식으로 먹었다.
배낭여행 중인 한국인을 만나면 따뜻한 밥과 김치를 제공해 그들을 감격하게 만들었다.
프라이부르크에서나 여행지에서 한국 사람만 만나면 누구나 불러다 밥을 대접하다 보니 유학생들이 웃었다.
“여기 좀 더 살다 간 한국에서 유럽 여행 책자에 나오겠다. 남독일에 가면 프라우 한을 찾아가라고. 맘씨 좋은 그 한국 아줌마를 찾아가면 한식을 대접받을 수 있다고.”
그날 한낮의 더위에 땀 뻘뻘 흘리며 쇼핑한 물건을 들고 2층 우리 집으로 이어진 계단을 오를 때였다. 불쑥 1층 곡(Gock) 할머니 집 문이 열렸다. 미소를 머금은 할머니가 손에 든 붉은 장미 다발을 내게 내밀었다.
“생일 축하해요! ”
집주인과 세든 사람 정도의 관계를 넘어 가깝게 지내긴 했지만, 36송이의 장미다발을 받을 만큼 내가 그녀에게 베푼 것은 없었다.
“어떻게 내 생일을 알았나요?”
고맙다는 말도 못 한 채 겨우 이 말을 던졌더니 자기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친다. 이사와 이야기했던 생년월일을 적어 놓았던 것일까?
장 보느라 늦어진 점심을 서둘러 준비하고, 식구들과 점심을 들 때 벨소리가 났다. 현관 출입문을 열었더니 조그만 선물 포장이 놓여 있고, 아무도 보이지 않은 채 자박자박 계단을 오르는 조용한 발소리가 났다. 3층에 사시는 당어(Danger) 할머니였다. 그분의 선물은 슈바르쯔발트의 멋진 풍경 사진이 가득 들은 책과 카드였다. 다시 식탁에 앉아 식사를 계속했으나, 북받치는 듯한 느낌이 들어 목이 메었다.
‘내가 이분들에게 해 드린 게 뭐기에…. 이분들께 이런 선물을 받을 만큼 친절을 베풀었을까? ’
나는 그랬다. 한국에 살건 독일에 잠시 머물건 나는 한국 여자이다. 그래서 이웃분들께 한국 아줌마 방식대로 대했던 것뿐이다. 만두나 잡채 따위 낯선 한국 음식이지만 맛있는 것을 하면 노인들께 갖다 드리고 맛보시라 했고, 바쁠 때는 할머니 댁에 가서 좀 놀다 오라고 아이들을 보내기도 했다. 이를테면 독일식의 규칙이나 예의보다는 정으로 사람들을 대하고자 했다. 그런 동양식 대인법이 1년에 두어 번씩밖에 가족들이 찾지 오지 않는 외로운 노인들에게 다소는 의외였고, 다정하게 느껴졌던 것일까 짐작할 뿐이었다.
저녁이 되었다.
식사 후, 식구들이 산책 나가고, 혼자 뒷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였다. 바깥에서 차소리가 나더니 연락도 없이 유학생 부부가 방문했다. 샴페인을 들고 생일을 축하해 주러 온 것이다. 그 당시 늘 우리 집에서 식사해서 내게 미안해하던 그들은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털어 좋은 샴페인을 가지고 축하해 주러 왔다.
꽃과 책과 샴페인.
36번째 생일에 내가 받은 선물이었다. 결혼 후 가장 큰 축하를 받아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선물 받은 동기를 생각해 보면 결국 내 몸 귀찮음을 좀 참고, 그들에게 조금 더 베풀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암스테르담에서 벨기에의 안트워프(불어로는 앙베르 Anvers, 독일어론 안트베르펜 Antwerpen)까지는 IC 기차로 2시간 남짓. 저녁 7시 25분 암스테르담 발의 그 기차를 탔었다. 밤 9시 30분이 되었는데도 창밖의 해는 아직 지평선까지 한 뼘쯤 남아 있었다. 태어나서 내가 맞은 가장 긴 낮이었고, 몸이 적응 안 될 만큼 낯선 경험이었다.
순수한 애정과 친절로 일관해 준 사람을 꼽으라면 누구보다 먼저 80대 당어(Danger) 할머니가 떠오른다.
귀국할 때 마지막으로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꼭 다시 한번 올게요. 그때까지 이곳에 계셔 주세요.”
“언제 다시 올 건데?”
하며 언뜻 그녀의 눈가에 번뜩이던 물기를 기억한다. 언젠가 독일을 다시 찾을 때까지 건강하게 사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