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선배가 가족 몰래 퇴사했다. 아침이면 출근한다고 나와서 남산도서관에 가서 하루를 보냈다. 간혹 선배의 모습을 그려 본다. 남산길을 천천히 걸어 오르는 모습. 서고 사이를 걸으며 거기 비치는 햇살 아래에서 잠시 멈추어 책을 고르는 모습. 식물처럼 고요히 자리에 앉아 책에 몰두한 모습. 도서관은 그녀에게 유일한, 쓸모 있는 도피처였다.
제주에 와서 가장 놀란 것은 도서관이다. 마을마다 가까이 도서관이 있어 손쉽게 이용할 수 있고, 늘 자리가 넉넉했다. 그래서 나도 선배처럼 입도 초기 할 일이 없을 때는 도서관에 자주 갔다.
서귀포 시내에는 삼매봉 도서관과 서귀포도서관(학생문화원 도서관)이 가까이 있어 두 곳을 자주 이용했다. 서귀포도서관은 출근길에 오가며 들르기 좋았고, 내 느낌에 신간이 빨랐다. 대신 삼매봉 도서관은 책이 많고, 주중에는 오전 내내 열람실이 한가했다. 나는 바깥 창을 살짝 열 수 있는 창가 자리가 좋았다. 책 보다 고개 들어 바깥의 녹색을 한참 보기도 했다.
지금도 삼매봉 도서관 식당은 은근히 유명하지만, 나는 식당을 개조하기 전에 단골이었다. 그 식당 아줌마는 솜씨도 좋았고, 무뚝뚝한 듯 보이지만 상냥하고 이쁜 사람이어서 지금도 어디서 뭘 하시는지 궁금하다.
내가 본 가장 멋진 도서관은 뉴욕 컬럼비아대학 도서관이다. 911 당시 그 대학에서 컴퓨터 강의를 듣고 있어,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었다. 미국 대학의 도서관은 복잡하지 않았다. 자리도 넉넉했고, 내부가 얼마나 아름답고 웅장했는지 내부 장식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거기서 책 보고 공부한다는 자체가 축복이었다.
제주에서 가장 빼어난 도서관은 제주대학교 도서관이었다. 그곳은 도민도 발전기금 5만 원을 내면 1년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었다.
https://lib.jejunu.ac.kr/#/service/user/user06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되고, 한 해는 매주 화목 오전 9시면 제주대 도서관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시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좋았다. 특히 유니버설 라운지는 마치 카페 같아 노트북도 마음대로 쓸 수 있었고, 조명과 자리 배치가 세련되어 입이 벙글벙글 했다.
화목에 오전 시간을 보내며 글도 쓰고, 공부도 하다가 허리가 뻐근하다 싶으면 위로 올라가 서고를 돌며 책 구경을 했다. 문학, 건축, 미술, 음악 등. 각각의 코너를 돌며 보고 싶은 책을 고르고, 읽다가 더 읽고 싶으면 대출도 가능했다. 시험 기간 한 주일은 학생들을 위해 일반인 출입을 금지했는데, 그 외에는 자리도 넉넉하고 고요했다. 가끔 사서들이 책을 제 자리에 넣으려고 밀고 다니는 책장 끄는 소리만 들릴 뿐, 그런 천국이 없었다.
도서관에 반해서였을 것이다. 그 인연으로 나는 제주대학교에서 시간제 학생으로 감귤학 강의를 들었다. 다시 이십 년 만에 듣는 대학 강의는 신선했고, 몇 주 지나니 같이 수업 듣는 학생 중 이야기 나누게 된 젊은이들도 생겨서 남편에게 막 자랑하기도 했다.
“우리가 말이야. 수업 마치면 얘기를 나누며 교실을 나온단 말이죠. 얼마나 기분 좋은지 알아요?”
공부가 딱히 힘들진 않았다. 원래는 제주대에서 한 2년 원예 강의를 들으려 했다. 하지만 서귀포에서 다니는 시간 대비 성과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내 사정에 학교는 더 이상 다니지 않는다.
코로나가 끝나고 다시 외국에 나가면서 가는 곳마다 도서관을 방문했다. 뉴욕에 한달살이 할 때도 공립도서관은 내 놀이터였고, 교토에서도 부립도서관에 갔다. 외국의 도서관이나 책방에 갈 때면 어떤 한국문학책이 있는지, 어떤 책이 그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있는지 찾아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나는 lifelong student이다. 평생 학생이 도서관 선진국인 제주에 살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 사진은 제주대학교 도서관 유니버설 라운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