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투명한 말이지만, 최근에 ㅇ의 소개로 가족의 병에 대해 어떤 이와 상담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말했다.
“이건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집안의 업보입니다. 종교가 있으신지요?”
업(業), 업보(業報), 카르마. 이 말은 지금 내가 짓는 모든 행동은 미래의 일로 나타나고, 지금 내가 당하는 일은 과거 일의 결과란 뜻이다. 무서운 말이다.
인간을 착하게 살게 만들려고 이런 말이 생겨난 걸까,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진리야 범인으로선 모르는 것이고.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있다.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되지 않는 인간 이상의 것이 있다.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가슴을 북북 쥐어뜯도록 아프고, 밤잠 자지 않고 고민하고, 시간과 힘을 다 바쳐 방향이 보이지 않는 노력을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 그래도 천만다행인 것은, 나는 ‘그럼 죽을까?’ 하는 인간 유형은 아닌 것이다. 머리꼭지에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바위를 얹고 살더라도.
인간의 영역 이상이 있음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 것은 임신과 출산을 겪으면서였다.
‘아, 이건 사람의 영역이 아니구나. 나 아닌 더 큰 무엇, 자연이건 신이건 정해진 운명이 주관하는 일이구나.’
하는 놀람이었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나는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가 「세속적 쾌락의 동산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 그림에서 묘사한 삶을 충실하게 살았다. 하지만 내가 어디서 뭘 하면서 사는지 몰랐다.
더 나이를 먹고, 몸과 마음이 힘 빠지고 탈색되고 나니 이제야 저절로 굴러가게 두어도 그리 흉하지 않은 바퀴처럼 돌아간다. 방만하지도 않고, 있는 체 없는 체, 잘난 체 아픈 체, 현학적인 체하지도 않는다. 오색 고깔 쓰지 않은 맨몸 그대로의 나를 세상에 불쑥 내민다.
글쓰기는 정갈한 자기 고백이다.
나이 드니 죽음에 대해 더 자세히 바라보게 된다. 시니컬하게는,
‘죽는 순간이 되면, 아 이제 쉴 수 있겠구나.’
하고 잠자기 직전처럼 편안하지 않을까 싶다.
그럴까?
도리어 끝이 안타까워 몸부림칠 건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메멘토 모리는 중세 유럽을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다. 죽음을 기억하면, 역설적으로 삶이 보인다. 오늘이 소중하고, 지금 내 삶을 가치 있고 즐겁게 보내야 한다. 죽음은 언제나 평등하고, 15세기의 「죽음의 인식과 삶의 환희」는 지금도 유효하다.
우비 순트를 기억한다.
(Ubi sunt, Ubi sunt qui ante nos fuerunt? 우리 앞에 있던 그들은 어디에 있나.)
그들은 사라지고, 나는 아직 여기 남았다. 갈 길이 하루 남았는지, 아직 몇십 년 남았는지도 모른 채.
나의 오늘이 넘치지 않도록 노력한다. 감정이 과잉하지 않고, 딱 그릇에 편하게 담길 만큼만 갖고 살고 싶다. 너무 마르면 글도 인생도 재미없으니까. 그리고 즐겨주자. 삶을, 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