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전체 혼인 중 재혼은 남자 16.3%, 여자 18.3%였고, 남녀 모두 재혼인 경우는 12.3%를 차지했다. 또 작년의 자료를 보면 가장 많이 재혼하는 나이는 남편과 아내 모두 50~54세였다.
즉 오십 세 무렵이 가장 재혼을 많이 하는 시기이다. 이 나이라면 당사자들의 부모도 살아계시고, 자녀들은 대학생이 되었거나 고교생일 것이다. 남편과 아내는 적어도 직계만 여덟 명의 가족을 배려해야 한다. 이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문제도 예측할 수 있다.
내가 15년간 재혼 생활을 하면서 느끼고 생각한 재혼 생활 가이드라인을 정리해 보았다.
새터에서 시작해야 한다. 또 감정적으로도 이혼해야 한다. 전의 결혼 상대자나 가족에 대한 미움을 잔뜩 안고 있는 상태에서 재혼하면 안 된다.
감정뿐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초혼 시 쓰던 물건은 과감하게 버리자. 이불, 그릇, 수저와 젓가락 등 생활용품은 버리고 저렴하더라도 새로 장만하자. 특히 부엌살림은 미묘한 갈등을 불러올 수 있다. 누구라도 전처가, 전 남편이 쓰던 숟가락으로 밥 먹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물건, 뜻있는 물건이라도 두 사람이 새 출발 하기 위해서는 모두 비워야 한다. 상대방의 물건을 버릴 때는 반드시 동의를 받아야 한다. 만약 상대방이 의미를 부여하는 물건에 대해서는 불편해도 양보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따로 배려해야 한다. 나는 그의 아이들을 위해 방에 엄마의 물건을 보관해 주었다. 집에 오면 아이는 엄마의 일기장과 입던 옷과 액세서리, 사진을 보며 엄마의 냄새를 확인했다. 스무 살이 넘고 서른이 되어도 그랬다. 내가 꺼렸던 것은 남편의 아내에 대한 자리이지, 아이들의 엄마로서의 자리가 아니었기에 그 추억을 지켜주었다.
부부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필요한 시도이다. 두 사람이 원하는 것을 자세하게 적어보자. 재산, 자녀 양육, 양가 가족, 주말 보내기나 여행, 싸워도 각방은 절대 쓰지 않는다는 결심까지 지침을 세워 놓자. 이 합의서가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지보다, 두 사람의 장래 생활에 대해 계획하는 차원에서 필요하다.
(다음다음 글에서 혼전 합의서에 대해 자세히 다루어 보겠습니다.)
이제 부부는 대등하게 살아야 한다. 어느 한쪽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결혼은 위기에 약하고, 결국에는 무너진다. 우리는 한번 호되게 겪었다. 그러니 이제 개선해 보자.
이혼이나 사별을 겪은 20~44세의 여성들이 재혼 계획이 없는 이유가
첫째, 결혼 생활을 다시 하고 싶지 않아서 46.3%
둘째, 현 자녀를 양육하는 데 전념하고 싶어서 29.4%
셋째, 마땅한 배우자를 만날 자신이 없어서 21.0%이다.
여성들이 재혼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사람 > 여자 > 엄마’ 순으로 삶이 영위되어야 하는데, ‘엄마 > 사람 > 여자’의 삶을 살아왔고, 살기 때문이다.
자녀가 어린 경우의 재혼은 많은 문제가 일어날 수 있기에 엄마로서는 피하고 싶다. 그래서 나도 아이들이 대학 간 후를 기다리며 9년을 홀로 살았다.
하지만 양육 자녀가 있는 경우에도 재혼을 결심한다면, 두 사람을 중심으로 한 생활이 되어야 한다. 저마다의 사정이 다르지만 두 사람만의 시간을 확보하도록 하자.
사실 자녀들이 다 컸다고 양육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결혼해야 비로소 집을 떠나게 된다. 최근에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당신에게 가장 고마운 점은 내 노후의 안정보다, 초기에 제 아이들과 5년 동안 살아준 점입니다. 당신 마음이 힘들었을 텐데. 지금에야 모든 게 보이네요.”
식을 올리기로 하고, 흰색 웨딩드레스를 입을지 많이 망설였다. 우세스러운 일이 아닐까. 흰색은 한 번만 입는 것 아닌가. 전통인지 아닌지 검색해 보기도 했다. 서양에서도 두 번째 결혼식에서 흰색을 제일 많이 입고, 옅은 크림색이나 심지어 검은색까지 다양하게 자기 개성대로 드레스를 입었다. 그러니 자신이 입고 싶은 것을 입자. 다시 한번 하얀 바탕에서 시작하고 싶다면 흰색 웨딩드레스도 좋다.
우리는 연구를 많이 해서 하객은 서른 명 정도만 초대했다. 축의금은 받지 않았으며, 주례는 없었고, 반지만 주고받았다. 웨딩 시간을 늘려 식을 마치고 같이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들이 바쁘지 않고, 아름다운 예식이어서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스몰 웨딩 하우스 같은 곳에서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서로의 가족 친구들과 친해질 시간을 갖는 게 좋다.
나는 재혼할 때 남편에게 영어로 내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다. 나와 남편에게는 각각 아들과 딸이 한 명씩 있어, 우리는 네 자녀의 부모가 되었다. 남편의 아이들은 영어권에서 오래 자라, 그들에게 한국식 이름을 부르라고 할 수 없었고, 엄마라는 호칭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당시는 아이들의 엄마가 살아있어서 더욱 아이들에게 갈등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아빠와 같이 사는 사람’이라고 여겨도 무관했다. 남편의 자녀들은 나를 ‘Stacy 스테이시’라 불렀다. 그래서 우리의 네 아이들은 제각각 좋은 대로 우리를 불렀다.
엄마, 아버지, 스테이시, 혹은 호칭 없이.
여기서 전 배우자란 뜻은, 자신의 배우자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배우자에게도 해당한다.
사실은 쉽지 않은 말이다. ‘엄마 아빠가 어떻게 살았는데’는 밤새 시리즈로 읊을 수 있을 만큼 이야기가 무진장이다. 가족이기에 나도 아들딸에게 아빠와 할머니에 대한 푸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은 자녀들의 불편한 표정을 보며 아차하고 반성하게 된다.
이혼과 재혼을 겪은 사람들은 이미 상당히 나이가 든 사람들이다. 인간적으로 성숙해지자.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는 잊자.
적어도 확고한 지침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시집 문제로 이혼하여 많은 상처가 남은 며느리에게 새로 출발할 용기를 줄 것이다.
“한 달에 두 번 주말에 시댁을 방문해서 저녁을 먹고 옵시다.”
라든지 형편에 맞는 권고를 남편이 아내에게 해준다면, 아내는 그에 따른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살 수 있다. 남편은 한 달에 한 번은 시댁에서 자고 오기를 원하는데, 아내가 그것만은 못 하겠다 싶을 수도 있다. 그러니 다시 문제의 불씨가 되기 전에 사전 합의를 하자.
재혼할 때 남편이 막내인 점이 좋았다. 그러나 막상 결혼해 보니, 장남 같은 막내였다. 시부모님들은 이혼한 딸과 손자까지 네 식구가 살았는데, 우리 집 곁으로 이사 오셨다. 그래서 서울에 살 때는 매주 토요일 저녁에 시댁에 가서 함께 저녁을 먹고 왔다. 하지만 시부모님들이 우리 살림을 도와주셨으면 도와주셨지, 간섭한 적이 없어서 큰 부담을 느끼지는 않았다.
나는 이혼 사유가 시어머니였던 낡은 시대의 며느리다. 하지만 안다. 시댁에 투자한 시간만큼 며느리는 인정받는다고 여겼다. 무엇보다 남편이 큰 바람막이가 되어주어 시댁 문제로 고통받은 적은 없었다.
* 아래의 글을 참고했습니다. 관심이 가시는 분은 더 읽어보세요.
행복한 재혼 생활을 위한 10 계명
https://happy.designhouse.co.kr/magazine/magazine_view/00010005/2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