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2009년 재혼을 앞둔 나의 각오
이혼 후 만 9년을 혼자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먹고사는 문제에 바빴고, 재혼은 전혀 생각 없었지요. 여자는 남편 없어도 아이들만 있으면 살아졌습니다. 하지만, 더 나이 먹고 노년을 앞두니 적막하고 두려워졌습니다.
2년 전, 이혼보다 더 큰일이 제게 닥쳤을 때 그가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저는 그에게서 힘을 받으며 살아왔고, 이제 재혼을 앞두고 있습니다. 마지막 휴가를 즐길 법한데 그렇지 못하군요. 동행이 없으니 심심할 따름입니다.
제가 그를 남은 인생의 동행으로 택한 까닭 중 으뜸은 그의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사람됨입니다. 저는 혼자 있으면 밝은 사람이 못 됩니다. 그건 유전적 소질이라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더군요.
그는 제가 까무룩히 가라앉을 때 힘 있는 말을 건네주어 다시 살아가게 했고, 혼자서 밥 잘해 먹고, 일도 단단히 해 나갔습니다.
또 그는 확신이 가지 않는 제 능력을 자꾸 끌어내어 주고 믿어주니, 용기가 나서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게 되었어요.
혼자된 후 공부하고 일만 하며 살아왔습니다. 가끔 나라 밖 여행을 며칠 다니기도 했지만, 그게 휴가의 다였다면 믿으실는지요. 토요일도 일요일도 없이 일 중독자처럼 일만 했습니다. 그를 만난 후 처음 여가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함께 일하고 함께 즐기며 쉬는 기쁨을요. 그건 제게 큰 의미였습니다.
얼마 전 동행이 서울에 휴가 나왔을 때, 토요일 아침부터 수업하고, 잠깐 점심 먹고 돌아가 또 수업하고, 또 저녁 먹고 바로 수업하는 저를 위해, 그는 점심과 저녁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밤에는 학원 문 앞에 마중 나왔어요. 그런 배려를 만나면 제 마음이 경건해집니다.
“호강하는구나!”
어머니께서 웃으시며 그러시더군요.
동행을 이년 가까이 만나면서, 우리가 일치하는 점이 많아 놀랐습니다. 부모님의 나이부터 사소한 취미까지 공유해서 둘이 있는 시간은 늘 재미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유쾌한 사람이거든요.
“만일 우리가 만나지 않았다면, 올해는 참 갈등 많은 해가 되었을 거야.”
우리는 서로 그런 말을 주고받습니다. 적절한 시기에 만난 두 사람입니다.
제가 왜 이만큼 그를 사랑하게 되었나 되짚어보니, 그는 저를 힘들게 하지 않더군요. 그 점이 제 마음에 결정적 방점을 찍게 했습니다.
이렇게 두 해를 서울과 모스크바와 싱가포르를 서로 오가며 사랑하다, 우리는 확신을 갖고 이제 죽는 날까지 함께 하려 합니다. 그간 마음속에 가졌던, 재혼을 앞둔 제 각오를 적어 봅니다.
저는 이제까지 그의 재산에 기여한 바가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의 재산은 그의 것이고, 얼마 안 되지만, 제 것은 저와 제 자식들을 위해 쓸 것입니다. 물론 제가 앞으로 공부하면 학비 또한 제가 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 가는 재산은 우리 공동 소유가 되겠지요. 저는 그에게 밥 얻어먹기 위하여 결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활비도 함께 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오래 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외국에서 대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다른 재혼 부부에 비하면 자녀들에 대한 부담은 적습니다. 여름과 겨울 방학에는 아이들 얼굴을 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까지는 아이가 둘이었지만, 곧 넷이 돼.”
얼마 전 후배에게 웃으며 그랬습니다.
저는 새로 생기는 자녀들에게 한국식 엄마로 대하려 합니다. 그저 따뜻하게 밥 먹이고, 재미있는 놀거리 찾아주고, 알바 자리도 알아봐 주고, 같이 일본 여행도 가고, 그렇게 여름을 지낼 겁니다. 중고생 제자들도 많고, 나이 먹으니 남의 아이도 모두 예뻐져, 그의 아이들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습니다.
다 큰 아이들이니 우리가 아이들에게 무엇이 되기를 요구하지 않으렵니다. 우리는 서로의 자녀들에게 아줌마, 아저씨밖에 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호칭보다 우리가 친해지는 게 훨씬 의미가 있다고 믿습니다.
올여름에 만날 아이들 넷이 서로 가까워지기를 바라지만, 그것도 무리하지는 않으렵니다. 시간의 흐름에 맡겨 보도록 하지요.
적지 않은 나이 탓에 우리 몸은 조금씩 낡아 있지요. 지금부터라도 일 좀 덜 하고, 둘이 손잡고 걷고, 집밥 해 먹고, 건강한 생활을 유지한다면, 앞으로 이십 년쯤은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틀 전 그가 서울에서 받은, 회사의 정기 검진 결과가 제게 배달이 되어 왔습니다. 그 기록을 자세히 검토해 보며, 저도 한 2년간 받지 않았던 정기 검진을 해보는 게 상대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 들어 신청해 두었습니다. 제 건강은 의무이고, 그의 건강은 제 책임입니다. 저는 책임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는 둘 다 힘든 시간을 겪은 후에 만난 사람입니다. 그 시간 속에서 많은 것을 느꼈고, 보았습니다.
우리라고 앞으로 맨날 좋기만 하겠습니까. 하지만 이제까지의 경험과 지혜를 모아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참고, 헤쳐 나갈 것입니다. 가정의 중요함은 없이 살아봤던 사람이 더 잘 압니다.
인간의 일에는 사람의 뜻과 하늘의 뜻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 스스로 최선을 다하면서 하늘의 뜻도 따라오기를 기도합니다.
하늘이시여.
우리에게 행복을 허락하소서.
2009. 5.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