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꼬낀느 Sep 19. 2024

재혼 전 각오와 15년 후 지금의 각오

1부. 2009년 재혼을 앞둔 나의 각오


이혼 후 만 9년을 혼자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먹고사는 문제에 바빴고, 재혼은 전혀 생각 없었지요. 여자는 남편 없어도 아이들만 있으면 살아졌습니다. 하지만, 더 나이 먹고 노년을 앞두니 적막하고 두려워졌습니다. 

2년 전, 이혼보다 더 큰일이 제게 닥쳤을 때 그가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저는 그에게서 힘을 받으며 살아왔고, 이제 재혼을 앞두고 있습니다. 마지막 휴가를 즐길 법한데 그렇지 못하군요. 동행이 없으니 심심할 따름입니다.      


제가 그를 남은 인생의 동행으로 택한 까닭 중 으뜸은 그의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사람됨입니다. 저는 혼자 있으면 밝은 사람이 못 됩니다. 그건 유전적 소질이라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더군요.

그는 제가 까무룩히 가라앉을 때 힘 있는 말을 건네주어 다시 살아가게 했고, 혼자서 밥 잘해 먹고, 일도 단단히 해 나갔습니다.

또 그는 확신이 가지 않는 제 능력을 자꾸 끌어내어 주고 믿어주니, 용기가 나서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게 되었어요.      


혼자된 후 공부하고 일만 하며 살아왔습니다. 가끔 나라 밖 여행을 며칠 다니기도 했지만, 그게 휴가의 다였다면 믿으실는지요. 토요일도 일요일도 없이 일 중독자처럼 일만 했습니다. 그를 만난 후 처음 여가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함께 일하고 함께 즐기며 쉬는 기쁨을요. 그건 제게 큰 의미였습니다.     


얼마 전 동행이 서울에 휴가 나왔을 때, 토요일 아침부터 수업하고, 잠깐 점심 먹고 돌아가 또 수업하고, 또 저녁 먹고 바로 수업하는 저를 위해, 그는 점심과 저녁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밤에는 학원 문 앞에 마중 나왔어요. 그런 배려를 만나면 제 마음이 경건해집니다.

“호강하는구나!”

어머니께서 웃으시며 그러시더군요.  

   

동행을 이년 가까이 만나면서, 우리가 일치하는 점이 많아 놀랐습니다. 부모님의 나이부터 사소한 취미까지 공유해서 둘이 있는 시간은 늘 재미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유쾌한 사람이거든요. 

“만일 우리가 만나지 않았다면, 올해는 참 갈등 많은 해가 되었을 거야.”

우리는 서로 그런 말을 주고받습니다. 적절한 시기에 만난 두 사람입니다.   

  

제가 왜 이만큼 그를 사랑하게 되었나 되짚어보니, 그는 저를 힘들게 하지 않더군요. 그 점이 제 마음에 결정적 방점을 찍게 했습니다.

이렇게 두 해를 서울과 모스크바와 싱가포르를 서로 오가며 사랑하다, 우리는 확신을 갖고 이제 죽는 날까지 함께 하려 합니다. 그간 마음속에 가졌던, 재혼을 앞둔 제 각오를 적어 봅니다.     


1. 각자의 재산은 각각의 것이다.     


저는 이제까지 그의 재산에 기여한 바가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의 재산은 그의 것이고, 얼마 안 되지만, 제 것은 저와 제 자식들을 위해 쓸 것입니다. 물론 제가 앞으로 공부하면 학비 또한 제가 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 가는 재산은 우리 공동 소유가 되겠지요. 저는 그에게 밥 얻어먹기 위하여 결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활비도 함께 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오래 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이제 나는 자녀가 둘이 아니라, 넷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외국에서 대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다른 재혼 부부에 비하면 자녀들에 대한 부담은 적습니다. 여름과 겨울 방학에는 아이들 얼굴을 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까지는 아이가 둘이었지만, 곧 넷이 돼.”

얼마 전 후배에게 웃으며 그랬습니다.


저는 새로 생기는 자녀들에게 한국식 엄마로 대하려 합니다. 그저 따뜻하게 밥 먹이고, 재미있는 놀거리 찾아주고, 알바 자리도 알아봐 주고, 같이 일본 여행도 가고, 그렇게 여름을 지낼 겁니다. 중고생 제자들도 많고, 나이 먹으니 남의 아이도 모두 예뻐져, 그의 아이들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습니다. 

    

다 큰 아이들이니 우리가 아이들에게 무엇이 되기를 요구하지 않으렵니다. 우리는 서로의 자녀들에게 아줌마, 아저씨밖에 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호칭보다 우리가 친해지는 게 훨씬 의미가 있다고 믿습니다.

올여름에 만날 아이들 넷이 서로 가까워지기를 바라지만, 그것도 무리하지는 않으렵니다. 시간의 흐름에 맡겨 보도록 하지요.           


3. 건강은 의무이다.     


적지 않은 나이 탓에 우리 몸은 조금씩 낡아 있지요. 지금부터라도 일 좀 덜 하고, 둘이 손잡고 걷고, 집밥 해 먹고, 건강한 생활을 유지한다면, 앞으로 이십 년쯤은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틀 전 그가 서울에서 받은, 회사의 정기 검진 결과가 제게 배달이 되어 왔습니다. 그 기록을 자세히 검토해 보며, 저도 한 2년간 받지 않았던 정기 검진을 해보는 게 상대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 들어 신청해 두었습니다.  제 건강은 의무이고, 그의 건강은 제 책임입니다. 저는 책임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힘을 발휘합니다.     


4.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는 가정을 지켜 나가겠다.    

 

우리는 둘 다 힘든 시간을 겪은 후에 만난 사람입니다. 그 시간 속에서 많은 것을 느꼈고, 보았습니다. 

우리라고 앞으로 맨날 좋기만 하겠습니까. 하지만 이제까지의 경험과 지혜를 모아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참고, 헤쳐 나갈 것입니다. 가정의 중요함은 없이 살아봤던 사람이 더 잘 압니다.      


인간의 일에는 사람의 뜻과 하늘의 뜻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 스스로 최선을 다하면서 하늘의 뜻도 따라오기를 기도합니다.

하늘이시여.

우리에게 행복을 허락하소서.     


2009. 5. 1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