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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낀느 Jul 07. 2023

나는 은근히 장마가 좋다

- 2023년 장마 소요(逍遙)


  

원래 더위는 못 이겼어. 내 손이 워낙 뜨겁잖니. 여름엔 내 손 만지기가 싫어.

“나 통일되면 평양 이북에 살 거야. 아니, 거기도 더우면 신의주나 청진쯤 가서 살래.”

여름 최고온도가 25도를 넘지 않는 곳에 살고 싶었어. 


그런데 작년 7월 말에 평창 음악제에 가보고 놀랐어. 거기, 알펜시아 리조트는 한여름에도 서늘했어. 아침 기온이 14~16도야. 덥지 않으니 평화롭고 행복하더라. 일 없으면 한여름엔 대관령에 와서 한 철 살다 가고 싶었어. 그래서 나는 은근히 장마가 좋은가 봐. 무더위 폭격은 나에게 너무 잔인하니까.     


제주도로 이사 와서 제일 놀란 것은 습기야. 육지에서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습기의 공격. 가장 먼저 장만한 살림이 성능 좋은 제습기였어. 물통 용량이 큼직한 것을 골랐지. 지금도 거실과 침실에 하루 한 번씩 돌리는데, 거실은 한 시간 이상 돌려야 정상습도로 돌아가. 물통에는 거의 한 바가지쯤 되는 물이 고여.      

제습기 돌리고, 에어컨 틀면 뽀송하니 살만해. 다행히 우리 집 전기는 태양광이잖니. 전기요금에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을 정도야. 이렇게 전기 부담이 없으니 여름이 좀 덜 괴롭긴 할 것 같지?   

   

어쩌면 나는 여름의 왕성한 생명력에 좀 밀리는 게 아닐까 싶어. 내겐 과한 당신이야. 가을에서 봄까지는 정원에서 노동과 구경이 적당히 균형 잡을 수 있는데, 여름엔 구경은 바닥이고, 노동의 수치만 높아.  

이제 우리 집 정원은 밀림이야. 남편은 매 주말이면 나무들과 씨름하고, 난 바닥에서 맹위를 떨치는 풀들을 제어해야 하는데, 요즘 그냥 보고만 있어. 얼마 전 수풀 사이에서 뱀이 나왔거든. 그다음 날 뱀 한 마리가 집 앞 도로에서 차에 납작하게 깔려 죽었어. 꽤 큰 놈이었어. 그걸 보고 난 후 뱀 노이로제에 걸려서, 차에 탈 때도 혹시 뱀이 차에는 들어오지 않나 걱정할 정도야.

‘차에 뱀이 들어올 수 있나?’

검색까지 해봤는데, 엔진룸을 통해 들어올 수도 있대. 결국 남편이 여러 가지 뱀 방제를 할 수 있는 도구까지 샀어.      


산속에 살려면 뱀이나 지네, 대왕거미들쯤은 친구 먹어야 하나 본데, 아직도 나는 그것들에 땀을 삐질삐질 흘려.

“아, 당동산에 산지 몇 년인데 아직도 지네가 무서워!”

여기 친구가 호통쳤어. 근데 출근해서 옷 사이에서 뭔가 가려워 털어보면 한 15cm는 되는 지네가 툭 떨어지는 경험을 하고 나면 극복이 안 돼.     


이렇게 여름은 내게 해결하기 힘든 과제들을 주어서, 난 은근히 장마가 더 오래갔으면 해. 습기를 제거하고, 비와 안개를 피해 창문을 닫고 앉아 있으면 글쓰기 좋은 온도가 된다.     


이제 얼마 후 장마가 끝나겠지?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와 광령리 사람들은 ‘어스생이’와 ‘골머리오름’에 항고지(무지개)가 뜨면 장마가 끝난다고 생각했다.>

어릴 적엔 무지개를 자주 봤는데, 서울에선 무지개가 드물더라. 그런데 제주에 오니 비가 그치면 커다란 무지개가 자주 하늘에 걸려. 무지개는 볼 때마다 아직도 가슴이 뛰어.     


 본격적으로 더위가 시작되면, 몸의 레벨을 가장 낮추고 그냥 견뎌. 그러다 보면 9월이 오지. 더위가 끝나는 무렵이면 다시 내 몸은 살아날 거야. 장마에 짓무르던 텃밭 오이와 고추, 상추도 나처럼 다시 살아나 서귀포의 긴 가을 내내 우리의 식탁을 가득 채워줄 거고.      


장마다.

‘시계 소릴 멈추고 커튼을 내려요. (산울림 노래 –둘이서)’

이 노래의 분위기처럼 글쓰기 좋은 장마다.

일단 무성한 풀과 뱀은 잊고, 나에게 몰두하기 좋은 계절이다. 친구야. 여름의 소요(騷擾)는 잊고, 우리 마음밭을 소요(逍遙)하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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