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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낀느 Jul 28. 2023

나는 왜 여행을 가는가

 학생들 방학이라 매일 쉼 없이 일만 하고 살고, 밤이면 고꾸라져 이른 잠을 잤다. 매 선택의 순간 ‘일부터!’ 하는 강박관념이 있다. 글 쓰고 싶고, 언어 공부하고 싶고, 늦은 밤까지 뒹굴거리며 드라마 보고 싶었다. 멍해진 머리를 비우고 싶었지만, 시간과 체력이 허락하지 않았다. 놀고먹고 쉬고 즐기는 것보다 산재해 있는 할 일들이 우선순위였다. 불평이 터졌고, 삶의 질은 바닥이었다.      


“선생님 휴가는 7월 28일에서 30일이다.”

“저도 그 기간에 캠프가요.”

“어머, 저희 가족도 그때 여행 가는데.”


좋아. 이제 3일은 ‘일!’ 강박을 벗어버리고, ‘내가 즐거운 것부터!’ 하며 사는 것이다.

근데 이게 왜 꼭 여행을 가야 가능하지? 더운 날, 여행 대신 집에서 발 뻗고 쉬는 게 더 편하지 않나? 싶어져, 여행이 내게 주는 의의를 따져본다.     


매력


자신을 고양하려는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사랑한다. 사랑하는 대상이 나와 비슷한 것은, 실은 자신이 바라는 모습 혹은 자신이 모자란 점을 보충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있는 듯한 상대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바로 거기 매력을 느끼기에, 사랑에 빠진다.     


우리는 오늘 평창음악제에 간다. 내 꿈은 세계의 음악제들을 한 달쯤 그곳에 머물면서 즐기는 것이다. 매년 7~9월에 런던에서 열리는 BBC 프롬스 음악 축제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가는 것이 ‘은퇴 후에 하고 싶은 일’ 목록 맨 앞에 있다.   

  

귀가 예민하게 태어났는데, 산속에 살기 시작한 후 더 예민해졌다. 서울에 가면 자주 우영우처럼 귀가 찢어질 듯 고통스러워 두 손으로 귀를 막곤 한다.

작년 평창음악제에 갔을 때 이틀 다섯 시간의 공연 시간 동안 졸지만 않아도 성공이다 싶었다. 아, 그런데 이상했다. 졸기는커녕, 귀가 음에 열렸고, 세포 하나하나가 바깥의 빗소리를 누르는 악기 소리에 젖었다. 하도 음악이 잘 들려서, ‘내가 죽을 때가 다 되어가나.’ 하며 소름 끼쳤다.          


발견     


사탕이나 젤리를 먹을 때, 세 가지 다른 맛을 한꺼번에 입에 넣고 먹는 것을 좋아한다. 각각 다른 맛이 입안에서 터지면서 미묘하게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어 재미있다. 음악제는 다른 맛 사탕이 한꺼번에 입 안에서 터지는 듯한 놀람을 준다.     

 

나는 언제나 바흐, 어디서나 바흐다. 바흐는 인간이 아니라 ‘신의 경계’에 있다. 19, 20세기 작곡가들의 곡들은 외계어였다. 

KBS Kong에서도 밤에 현대음악곡이 나오면,

‘아 이 시간에 무슨. 좀 편안한 곡 틀지.’ 그럴 정도로 바흐와 헨델과 모차르트에 편파적이다. 


그런데, 작년의 평창음악제에서 연주자들의 열성적인 연주 덕에 새로운 악기에 눈떴다. 플루트가 그렇게 다양한 몸짓으로 악기들의 주연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 했다. 안드레아 리버크네히트의 플루트와 함경의 오보에에 반했다. 클라리넷만 관심 있었지, 오보에에 주목한 적도 없었다. 이런 새롭고 낯선 것들에 대한 발견이 매혹적이다.      


설렘


맨 처음 그의 집에 갔을 때, 사진첩에서 고등학교 때 사진을 보았다. 어린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던 나로서는 보물을 발견한 셈이다.

“어머니, 제가 이 사진 가져도 될까요?”

하며 넉살 좋게 얻어왔다. 

그는 열아홉에 이런 얼굴과 표정을 하고 있었구나. 나는 그를 조금 더 보게 되었다.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되고, 육 개월쯤 지나면 그가 꿈에 나타났다. 내 무의식은 느린 속도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 사람이 사라져도 육 개월쯤은 꿈에 자주 보였다. 아직 적응 못한 탓이다. 

그 사이. 꿈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까지. 한 사람과의 경험들은 발견과 설렘을 반복한다. 그러고 보면 여행은 마치 새로운 사람과의 사랑 비슷하다. 


여행을 시작하는 오늘, 해야 할 일 없이 편안하게 글머리를 생각하다, 다시 설렘이 찾아오기 시작하다. 


행복


새 책을 읽을 때, 연필로 표시하거나 접어둔다. 어느 순간 나중에 그 책을 읽을 그를 위해 표시를 지워주는 게 예의가 아닐까 싶었다. 

가끔 같은 책이나 영화를 보고 난 후 얘기를 나누다 보면 서로 인상적인 포인트가 다르다. 마치 나는 씨줄로 머릿속에 그림을 그린다면, 그는 날줄로 그려, 두 그림을 합해 보면 전체적인 윤곽이 더 선명해진다. 그래서 나는 우리 둘이 함께 무언가 하는 걸 좋아한다.     


나이를 먹는 게 상실이 아니라 열린 수확일 때가 있다. 젊었을 때는 분명 버려야 할 게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버려야 할 것은 없고, 얻는 게 많다. 나는 여행할수록 똑똑해진다. 그래서 기꺼이 매력적인 그곳들로 떠난다.     


오늘 2박 3일의 평창 여행을 간다.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고, 설레고, 그리고 마침내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오면 내 자리가 편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것이다.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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