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여섯의 가을 - 후 항암
비 때문이었을까, 어제는 평온한 하루였는데 밤에 약한 우울감이 찾아왔다.
그런 밤엔 웅크리고 자게 된다. 뻣뻣한 어깨로 아침 알람을 듣는다. 익숙한 목과 어깨의 통증을 오랜만에 느낀다. 어깨를 힘껏 뒤로 젖혀보지만, 뭉친 근육은 오래된 군살처럼 꿈쩍하지 않는다.
아침 알람을 들으면 귀와 몸이 한 정거장쯤 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귀는 이미 아침에 도착했는데, 나머지 몸들은 느릿느릿, 최대한 꾸물꾸물 아침으로 다가오는 기분이다. 좀 더 뒹굴뒹굴하며 약간 까실하면서도 부드러운 여름 이불의 촉감을 최대한 즐긴다.
비슷한 시간에 울리는 남편의 알람. 남편은 귀 옆에서 알람이 울려도 잘 자는 능력자이다. 가끔은 내가, 가끔은 아들이 자다 일어나 남편의 알람을 끄고 다시 잔다. 남편 알람소리에 아들이 참지 못하고 부스스 일어나 끄는 모습이 너무 웃겨서, 가끔은 자는 척하고 몰래 보기도 한다.
후 항암 약은 또 새로운 부작용들을 데리고 왔다. 수족증후군이라는 손발 증상이 가장 심하다. 손과 발이 매미인양 여러 차례 허물을 벗고 있다. 걸을 때면 예민해진 발과 관절 때문에 동화 속 빨간 구두를 신고 춤을 추는 기분이다. 일어난 직후엔 오른손이 잘 구부러지지 않아, 왼손 엄지로 오른손 손바닥을 문지르며 주물러준다. 오른손이 왼손의 따뜻함을 느낀다. 그냥 고마워진다. 아침이 시작된 것이, 오늘도 아침하늘에 구름이 너무 예쁜 것이.
집안의 창을 모두 연다. 약간 서늘해서 더 청량하게 느껴지는 바람이 들어온다. 이른 아침 바다가 생각나는 바람이다. 베란다에 요가 매트를 깔고 누워서 하늘을 본다. 꼭 저녁노을 같은 짙은 오렌지빛의 기운이 깃털 같은 하얀 구름 사이로 길게 늘어져 있다. 아. 너무 아름답다. ‘청계천을 달리면서 저 하늘을 보면 진짜 끝내주겠구나’ 생각한다. 이 약을 끝내고 새벽하늘과 달리는 나를 상상하니 기분이 조금 올라온다.
갑자기 ‘아들 아침 뭐 주지?’ 란 물음이 떠오른다. 잠시 고민하다, 지워버린다. 하늘의 붉은 기운이 사라지고 솜털 같기도, 깃털 같기도 한 잔잔한 구름들이 퍼져나가며 흘러가는 걸 바라본다. 그냥 좋다. 비로소, 오늘 하루가 시작된 것이 기뻐진다. 짧은 잠옷 밖으로 나온 팔과 다리에 스치는 바람 덕에 배 갑판에 누워있는 기분이다. 요가소년의 호흡영상을 틀어놓고 눈을 감는다. 아직도 뻣뻣한 어깨의 긴장을 내려놓으려고 시도해 본다. 배와 가슴으로 호흡을 느껴본다. 창 밖의 초록 공기가 내 코로 들어오는 상상을 한다.
이제, 오늘 하루도 즐거울 거란 확신이 든다. 잘 살아낼 자신이 든다. 초록 사과를 먹을 생각에 살짝 침이 고인다. 일요일 아침 7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이 시간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