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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e Mar 20. 2020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오늘은 이별하는 날이었다. 예상한 것보다 그 순간은 더 일찍, 그리고 성큼 다가왔다. 우리 가족과 9년을 함께한 자동차, 그레이스를 떠나보내는 길. 구매자가 기다리고 있는 안산까지의 마지막 주행은 퍽 짧게만 느껴졌다. 아쉬운 마음에 속도를 늦춰가며 조심스레 몰았더니 성질 급한 차들이 나를 힐난하듯 마구 앞질러 갔다. 미안해요. 오늘 하루만 좀 답답하게 운전할게요.

 



거래 과정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자동차등록증을 상대에게 보여주고, 미리 합의된 가격으로 작성된 매매계약서에 인감도장을 찍으면 끝이었다. 우리와 10만 km를 넘게 달린 자동차는 그리도 쉽게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갔다. 아주 가뿐하게.


인도를 위한 검수 과정. 차에 생긴 크고 작은 상처들을 확인할 때마다 관련된 추억들이 하나 둘 꼬리를 물고 딸려 나왔다. 이 유리창의 실금은 아버지 병원 모시고 다닐 때. 이 옆구리의 스크래치는 친구들과 가평에 놀러 갔을 때. 아, 이 사이드 미러는.


이 차에 '그레이스'라는 이름을 주었던 이와는 몇 해 전 이별했다. 쌀쌀했던 어느 날 한적한 한강 공원 주차장에서 우린 오래 대화를 나눴다. 그가 이유를 물었고, 나는 쓸데없이 솔직했고, 그는 이내 조용히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그는 그간 고마웠던 일들과 못내 서운했던 일들과 여태껏 차마 꺼내지 못했던 사소한 응어리들을 모두 풀어내고 말갛게 이별하자고 했다.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끝맺음마저 그 사람답게 차분하고 성숙했다. 그렇게 그를 마지막으로 바래다주고, 고마웠다고 말하고, 짧게 안아주고 다시 차에 오르는 그 길이 얼마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던지. 이별을 고하는 주제에 이별이 참 힘들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동요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다. 결국 그게 마지막이었다. 절대 헤어질 것 같지 않았던 우리도 마침내 끝이 났다. 사이드 미러를 사이에 두고. 내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당신의 모습을 내가 바라보면서. 거울엔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이미 우리는 속절없이 멀어지고 있었는데도.




자동차를 넘겨주고 돌아오는 길, 어딘가 계속 불편다. 그동안 못해준 것만 떠오르는 까닭이다. 돌이켜보면  유독 차량 관련 지출에 인색했다. 청구서가 두려워 괜히 정비소를 멀리하기 일쑤였정기 점검에도 소홀했다. 휠 얼라인먼트를 제때 봐주지 않아 타이어가 터진 적이 두 번이다. 엔진오일 가는 타이밍도 몇 번을 놓쳤는지 모른다. 집 다음으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게 차 안인데. 여태껏 나 가족들을 무사고로 잘 지켜준 녀석인데. 조금 더 신경 써줄 걸.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마지막 가는 길 그 흔한 손세차 한번 못해준 거다. 비가 온다는 핑계로, 눈이 온다는 핑계로, 미세먼지가 많다는 핑계로 미루고 미루다 온통 얼룩덜룩한 모습으로 마지막 인사를 했다. 9년을 함께한 녀석에게 세차를, 세차를, 고작 세차 따위를 못해줬다.

세차를 못해줘서 정말 정말 미안해

왜 맨날 이별이란 게 다 그런 식인지 모르겠다. 이제 끝이야, 하고 냉정하게 돌아서서 내 갈길 가다가도, 내가 못해준 것들이 자꾸 내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는 거다. 무릎이 깨지고 시퍼런 멍이 들때서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거다. 아, 나 진짜 못났었구나 하고. 그러면 뒤이어 의아해지는 거다. 그런 나를 받아준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거지. 어떻게 이별을 통보받는 순간조차도 나를 진심으로 응원해줄 수 있었던 거지. 그 마음을 이해하려면 나는 얼마나 더 초라해져야 하는 거지. 당신이 앉았던 조수석, 당신의 실루엣이 갇혀있는 사이드 미러와도 꺼번에 별하 돌아온 오, 염치도 없고 소용도 없는 푸념을 또 속으로 되뇐다. 귀찮아하지 말고 긴 머리를 한 번 더 말려줄걸. 좋아하던 꽃다발을 더 자주 품에 안겨줄걸. 진짜 뭐 방금 연당한 사람처럼 처량하게.




이제 정든 나의 자동차는 없다. 우리가 다음 여행을, 그다음 여행을 약속했던 배경이자, 함께 노래를 감상하던 음악 부스이자,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눴던 공간까지도 이젠 모두 가버리고 없다. 나는 장소 하나를 통째로 잃어버린 기분이라 영 쓸하기만 하다. 그래, 이젠 이별과도 이별해야지. 지나간 일은 자연스레 흩어지게 두어야지. 하지만 나는 가끔 생각한다. 소중한 것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고 거울이 말을 걸어오던 그 밤 대해. 나는 떠나가고 당신은 붙잡지 던 그 밤, 당신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당신이 내 가까이에 있고 내가 당신으로부터 멀어져 가던 일이 비단 그 날 뿐이었을까. 렇다면 언제부터였을까. 제부터 당신은 그토록 애타고 초조했을까. 시각각 아나는 나를 지켜면서 당신의 마음은 얼마나 깜깜했을까.


(2020.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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