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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e Apr 21. 2020

갑자기 글이 안 써져요



브런치를 시작한 지 정확히 1년, 갑자기 글이 안 써진다. 일신상의 변화는 전혀 없는데 글만 안 써진다. 혹자는 갑자기 행복해지거나 결핍이 해소되면 글머리가 막힌다던데, 나는 여전히 애인이 없고 소개팅에서도 번번이 헛물을 켜는 중이다. (하하하 젠장.) 이전처럼 꾸준히 서점도 가고 종종 메모도 하고 혹시 인풋이 부족한가 싶어 다른 작가의 글들도 매일 챙겨 읽는데, 당최 이유가 뭔지 알 수가 없다. 쓰고 싶은 소재가 없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은 차고 넘친다. 문제는 아무리 써도 글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거다. 쓰면 쓸수록 더 깊은 미로에 갇히는 기분이다. 요리 보고 저리 보고 멀리서 보고 묵혀뒀다 꺼내봐도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말로만 듣던 슬럼프가 나에게도 왔나. 나 여태 어떻게 썼지.


매달 하나의 글을 쓰기로 약속한 매거진도 지난 회차에 펑크를 냈고, 어제였던 개인 발행일도 지키지 못했다. 최근 써오던 글 하나도 70% 지점에서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다. 그렇게 쌓인 미완성 글감이 벌써 여섯 개째. 경험상 한번 쓰다가 때를 놓친 글은 다시 살리기가 훨씬 힘들다. 아마 그 글들은 물 주는 걸 까먹은 식물처럼 꼬들꼬들 말라갈 것이다. '작가의 서랍'이란 감옥에서 무기수로 복역하다가 결국 사형을 언도받을 것이다.


순간 무언의 공포가 나를 사로잡았다. 이대로 가다가 평생 아무 글도 못 쓰게 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여태까지 내 글쓰기를 지탱해온 건 뭐였을까. 초심자의 행운이었을까. 쓰지 않던 나날 동안 쟁여놓은 비상식량 같은 거였을까. 그게 뭐였든 간에 이제 모두 바닥났다. 나의 글쓰기 유통기한은 딱 일 년 정도였구나. 몇 년이고 묵묵히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이들이 새삼 대단해 보인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따끈따끈한 원고를 보내는 이슬아 같은 작가들은 외계인이 분명하다. 그들에게도 권태기가 있긴 했을까. 슬럼프는 어떻게 극복했을까. 차라리 몸이라도 아프면 핑계삼을 수 있겠으나 나는 전에 없이 건강하고 튼튼하다. 매달 규칙적으로 발행하겠노라 독자님들과 나 자신에게 호언했던 1월의 내가 얄미워진다. 너 정말 대책 없는 놈이었구나.


홧김에 책을 세 권이나 샀다


그렇다. 유통기한은 끝났다. 운빨과 영감에 의지해 술술 써대던 좋은 시절은 다 갔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자. 우유의 쓸모는 단지 신선함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기한이 지났다고 우유의 효용이 다한 것은 아니다. 좋은 발효종과 충분한 시간만 담보된다면 우유는 요거트도 치즈도 될 수 있는 법이다. 누군가 그랬었다. 작가에겐 등단작이 아니라 두 번째 작품이 더 중요하다고. 스스로에 대한 진짜 증명은 두 번째 작품으로 하는 거라고. (원히트 원더로 묻혀버린 아티스트들이 얼마나 많은가) 글로 입신양명할 생각은 없지만, 저 말을 빌려오자면 이제까지가 연습 게임이었겠다. 꾸준히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해선 앞으로의 날들이 본 게임이겠다. 글쓰기를 내 쪽으로 무너뜨리기 위한 줄다리기. 지금 줄을 놓쳐버리면 영영 다시 잡기 어려울 테다. 정신 바짝 차리고 적극적으로 슬럼프를 격파해야지. 근데 뭐부터 해야 하지. 글쓰기 강의를 들어볼까. 당분간 아예 쓰지 말고 주구장창 읽기만 할까. 아니면 영화나 다큐멘터리나 다른 매체를 접해야 할까.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께 부탁드립니다. 슬럼프 극복 노하우가 있다면 공유해주세요. 상한 우유로 끝나고 싶지 않아요. 흑흑.


글쓰기 자아가 붕괴하는 와중에 기를 쓰고 지켜낸 나의 마지막 자존심은 이것이다. 아예 쓰지 못할지언정 대충 쓰지는 말자. 내가 사랑할 수 없는 글을 세상에 내지는 말자. 앞으로도 이 약속을 끝까지 지키고 싶다. 오늘도 꾸준히 글을 업로드하는 브런치의 모든 작가님들에게 무한한 존경을 표하며, 메리 올리버의 <긴 호흡> 서문의 한 부분으로 끝을 맺는다. 언제 그랬냐는 듯 툭툭 털고 금방 돌아올 수 있기를. 잠시만 안녕.


지금은 어둡다. 밤의 첫 커브가 아닌 마지막 커브, 나의 시간이다. 곧 이 필연적인 어둠에서 빛이 솟을 것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표현을 쓰자면 변덕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진지하게, 일을 시작한다. 내게 일이라 함은 걷고, 사물들을 보고, 귀 기울여 듣고, 작은 공책에 말들을 적는 것이다. 나중에, 긴 시간이 지난 뒤에 이 말들의 모임은 다른 책에 오를 가치가 있는 무언가가 되어 지금 이 시간 내가 달콤한 어둠 속에서 보거나 들은 걸 여러분이 알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바람대로 여러분이 이 책을 통해 야생의 세계에 대해 전보다 더 큰 호기심을 갖게 된다면 말이다. 어쩌면. 그동안, 굿 나잇.


(2020.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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